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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잔 Aug 31. 2023

비에 술 탄 듯, 술에 비 탄 듯

- 흐리게 봐도 괜찮다!

어떤 이유로 그토록 비를 열망하며 살았던 걸까!

뻣뻣했던 땅이 흥건해지고, 우산을 써도 어깨 한쪽이 젖고, 촘촘히 들리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이 가진 다정함의 온도가 1도씩은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사람들이 더없이 정겹고 연민의 감정이 움텄다. 이 마음이 황홀하게 좋아서 비가 오는 날은 낮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빗소리와 함께 이유 모를 설움도 술잔 안으로 흘러들었다.


대학 시절, 명동에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낮에는 전통차와 간단한 식사를, 저녁에는 술을 파는 곳이었다. 손님들은 근처 명동 성당 신부님들이나 직장인들이었다.


어느 날, 주인아저씨가 방학 때 알바를 하지 않겠냐고 하면서 파격적인 보수를 제안했다. 당시에 시간당 1500원 정도였는데, 2500원을 준다는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일을 시작한 이후로 손님이 급격히 늘어서 주인아저씨도 나도 신이 났다.


"저, 아저씨, 근데 카운터 밑에 양주 저 좀 마셔도 돼요?"

"당연하지! 마셔 마셔!"

기분이 좋아진 아저씨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바로 승낙을 했다.


카운터 밑에는 여러 종류의 양주들이 놓여 있었다. 전에 칵테일을 만들어 팔다가 메뉴에서 빠지면서 남은 것들이라고 하셨다. 비가 오는 날이면 크게 표가 안 날만큼 조금씩 종이컵에 따라서 마셨다. 그런데 그 해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양주들이 꽤 비어갈 즈음 공부를 이유로 알바를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도 약간의 죄책감이 남아 있다.   


회사 다닐 때도 내 핸드백에는 늘 꼬마 양주가 들어 있었다. 언제든 공격 준비가 되어 있는 무기 같은 것이었다. 그 예쁘고 앙증맞은 양주가 립스틱과 나란히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회사 홍보실 업무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어서 양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일을 하기도 했는데, 참으로 짜릿했다. 겉으로 표는 안 났지만 적당한 취기를 만끽하면서 창의성은 더 발현되었다.


나이 마흔, 박완서 작가님이 등단하셨던 그 나이가 되었을 때, 마음의 몸살을 앓고 문예창작대학원에 진학했다. 학교 가는 길에 텀블러를 챙기고 와인을 가득 채웠다. 수업을 들으면서 몰래 홀짝거렸던 그 와인과 문학에 대한 갈망으로 벅차올랐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같이 공부했던 동기들은 물이나 커피인 줄 알았다며,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와인을 나누어 마시고, 함께 웃었던 추억이 있다. 이후에 텀블러를 들고 다니시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


내 삶이 온통 술에 취해 살았던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다. 술이 센 편이었지만, 많이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흐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불행은 똑바로 정신 차리고 바라볼수록 고통을 동반한다.  흐리게 봐도 괜찮다. 계속 흐리게 봐도 괜찮았다.  

비에 술 탄 듯, 술에 비 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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