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은 슬픔이자 축전이었다!
아직 어둡다. 날이 밝기도 전에 눈이 떠지는 것은 나의 어제가 시끄러웠고, 오늘 하루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일기 예보’ 같은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무언가를 잡아 습관처럼 눌렀다. TV 브라운관 화면이 환하게 켜졌다. 눈이 찡그려졌다. 침대 맡에 손을 뻗어 인공눈물을 눈에 몇 방울 떨어뜨리고 나서야 그 밝은 곳을 응시한다.
케이블 TV에서 코로나 여파로 실직한 어느 가장이 차에 번개탄을 피워 놓고 가족과 동반 자살을 했다는 뉴스였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아이들은 무슨 잘못이냐며 부모의 무책임함을 비난하는 댓글들이 줄을 잇는다.
그러므로, 나의 엄마는 무책임했을까!
뉴스는 슬프고 어두운 화면을 야멸차게 걷어내고, 개나리가 피기 시작했다며 화면을 샛노랗게 채운다.
‘그럼에도 봄은 왔구나!’
가벼워진 옷차림 만으로도 마음은 들뜨고, 발끝까지 시리던 추위도 곧 잊혀 갈 것이다. 겨울이 웅크린 자리에서 이렇게 새로운 계절은 나를 설레게 했다.
무언가가 특별히 좋아지는 것은, 지독하게 싫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난 겨울이 유독 싫었다. 그래서 봄은 4분의 3박자 왈츠처럼 신나게 다가왔다.
아홉 살을 앞둔 겨울의 끝자락에서 엄마는 삼 남매를 나란히 누이고 방 안에서 연탄불을 피우셨다. 방안은 이내 온기가 돌았고, 붉은빛이 잦아드느라 연기는 깊고 그윽했다. 눈을 감으니 아빠가 연탄불에 석쇠를 올리고 닭똥집을 구워 주셨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연탄불 위에 이미 검게 그을린 국자를 올리고, 달고나를 해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설탕을 빨리 녹이려고 힘주어 둥근 선을 그리던 나무젓가락이 된 듯 빙빙 도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린 나로서는 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머릿속은 발랄함을 끈기 있게 붙잡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본능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몸을 뒤척거림으로써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드러냈다. 마음만 부스럭거렸는지, 온몸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엄마는 장엄한 목소리로 “너는 살아”라고 선포하듯 말했다.
한두 살이라도 더 많은 생명에게 준 기회였음을 바로 알아차렸지만, 선뜻 일어나서 나갈 수가 없었다. 끝까지 발랄함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나와 다르게 동생들이 갑자기 격렬하게 흐느꼈기 때문이다.
그날의 일은, 엄마가 우리 남매들을 하나로 모아 두었던 이불을 걷어내고,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무 일 없듯이 집에 2개 남은 라면을 끓이고, 찬밥을 말아 나누어 먹고, 아무도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네 살이나 어린 여동생이 불쑥 그날의 일을 말했다.
“언니! 그때 연탄가스 기억나? 너무 무서웠어.”
난 의연한 척했지만 머릿속의 실타래가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왜 내 기억 속에만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을까! 동생들은 너무 어린 나이여서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다.
사실 한 번쯤 더 우리는 연탄가스를 마셨던 것 같고, 누군가의 등에 업혀 다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갔던 기억이 있다. 사고였는지 고의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때 고작 나이 서른 즈음이었던 엄마의 삶에 늘 연탄불이 피워져 있었을 거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날, 우리가 누워 있던 방안에 연탄 화덕을 들여놓은 엄마는 무책임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엄마에게 그 어떤 잣대도 들이댈 수가 없다. 올바른 선택이 아닐지라도 죽음까지 책임지겠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엄마는 우리가 어른이 될 때까지 무능력했던 가장을 대신해서 고단하게 살았다. 아빠는 사업이 실패할 때마다 혼자서 자취를 감추었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의 눈물을, 엄마의 삶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야 우리 모두에게 상처로 남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다.
나는 아이들과 동반 자살을 선택하는 부모들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을 흘려줄 수밖에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해 보지 않고 타인의 삶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가슴 시렸던 겨울, 그 끝에는 분명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도 있었다. 힘들었던 그 기억들을 흐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참으로 기뻤다. ‘향수’라는 단어로 거창하게 포장할 수도 있고, 삶은 슬픔이면서 축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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