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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 Jun 04. 2024

고독의 정수를 맛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담마코리아를 추천합니다


*이 글은 담마코리아의 위빳사나 명상수련 10일 코스를 마치고 쓰는, 지극히 사적인 소회입니다.


*혹여 10일 코스 참가확정을 받고 수련에 들어가기 앞서 서칭을 하다 이 글을 발견하셨다면 읽지 않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사전에 다른 이의 경험 내용을 알고 명상에 들어가게 되면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당신만의 순수한 담마 경험을 응원합니다.




세상에. 이곳에 다시 오게 되다니. 딱 5년 만이다. 2019년 4월 나는 이곳 진안에서 첫 10일 코스를 마쳤다. 눈물 나게 힘들었다. 아무래도 명상과 나는 맞지 않나 봐, 근 5년 동안 명상에 대한 나의 열등감만 무럭무럭 키워왔었다. 근데 왜 다시 이곳을 찾게 되었을까? 나도 모르겠다.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이 명상법에 진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 사실은 5년 동안 담마의 씨앗을 결코 내다 버린 적이 없다.


실로 담마(Dhamma)라는 말 자체가 진리라는 뜻이다. 담마는 생소해도 다르마는 들어봤을 수 있다. 빠알리어냐, 산스크리트어냐의 차이다. 무슨 진리인가? 그것은 고타마 붓다가 발견한 해탈을 향한 수행법, 바로 위빳사나를 말한다. 여기에는 어떤 종교적 의미도, 의식도, 전통도 없다. 오로지 개인의 성실하고 진지한 수행만을 요구한다. 나도 처음에는 사이비가 아닐까 의심했었다. 어떻게 12박 13일 동안 아무 비용도 요구하지 않는 명상센터가 있을 수 있지? 수상해. 지금도 구글에 담마코리아를 치면 자동 연관검색어로 '담마코리아 사이비'가 뜬다. 이곳에 와서 직접 경험해 보면 단박에 알게 된다. 경험해보지 않은 자들의 무지에 마저 자비를 보내는 것이 바로 담마의 순수성이다.


그렇지만 접수를 하고 첫 저녁 명상시간이 되었을 때, 명상홀에 들어가 앉자마자 후회했다. 아, 맞다. 이거 엄청 힘들었었는데. 어쩌다 또 여기 앉아있는 거지? 몸을 베베 꼬며 미칠듯한 답답함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2019년 첫 수련에서 난 명상을 했다기보다는 '시간을 버텨냈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정도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대체 왜, 왜 또,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대체 왜.



수련 이틀 전, 너무 심심해서 밤에 맥주 한 캔을 까마시며 드라마를 시작했다. 한지민, 정해인 주연의 <봄밤>. 지금 봄이고 밤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것이다. 근데 웬걸,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이틀 내내 정주행 했으나 다 끝내질 못했다. 전주역에 내려가는 KTX 안에서까지 열심히 보았으나 결국 결말을 보지 못한 채로 휴대폰을 제출하고 수련에 들어갔다. 이 상태로 명상을 시작하니 귀에선 드라마 주제곡이 넘실, 머릿속으론 '그래서 얘네가 잘되는 거야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다는 거야' 너무 궁금해서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평소엔 보지도 않던 드라마를 대체 왜, 왜 하필 오기 직전에 시작해서 이러고 있는 건지.


아무튼 이러나저러나 수련은 시작되었으니 이제 낙장불입이다. 엄마는 한 이틀만 하고 집에 오랬지만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새벽 4시 기상, 밤 9시 반 소등. 무려 구수련생은 정오 이후로 금식이다. 그렇게 쫄쫄 굶으며 우거지상으로 명상을 하다가 문득, 2019년도에 이곳에 와서 수련을 하던 내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고 싶어서 이곳을 찾았던 스물일곱의 나. 웃긴 건 당시의 나는 여기서 스무 살의 나를 대견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나온 극복 스토리는 훌륭한 레퍼런스가 된다. 그렇게 스물일곱의 나를 떠올리다 보니 어쩐 일인지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응원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어떻게든 잘 해내게 되어 있어. 그러니 외로워하지 마. 시간의 흐름이 선형이 아니라 원형처럼 느껴졌다. 2019년의 나와 2024년의 나는 담마로 연결되어 서로를 응원해주고 있었다.



아딧타나가 시작된 이후로는 탈동일시를 경험했다. 아딧타나는 한 시간 동안 손 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명상하는 시간인데, 2019년에 왔을 땐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해 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두 번째 수련이라 그럴까. 일상을 살며 내가 얼마나 안락함과 편안함에 동일시되어 있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의 불편함, 아주 약간의 고통마저도 말끔하게 제거하고 싶어 하던 나. 위빳사나에서 통증은 알아차림 수준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좋은 재료가 된다. 통증이 이렇게 소중할 수도 있구나.


그래. 사실 삶의 밑바탕이 되는 재료는 고통이다. 이건 염세적이거나 회의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명상한답시고 잠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몸의 통증이 거북해서 부산스레 움직이는 나 자신을 관찰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인간은 이 잠깐의 고통도 참기 싫어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 말인 즉 고통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고통에도 즐거움에도 휩쓸리지 않고 초연히 그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관찰자 '나'의 자리를 키워가는 거고, 그 훈련방법이 바로 위빳사나이다.

나는 2019년에 수련을 마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석사논문을 썼고, 우수논문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근데 이번에 수련을 하면서야 비로소 내 논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수많은 학문적 조사 내용들, 연구 참여자들의 이야기들, 현학적이고 어려운 단어로 설명된 이론들. 그렇게 열심히 썼어도 단 한 번 제대로 경험해 보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은 때로 독이 되고, 붓다도 그걸 알았기에 지속적으로 '개인의 경험과 성실한 노력'을 강조했다.


명상을 하며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으나 그 또한 다 풀어내다 보면 그저 그런 현학적인 이야기가 될 것을 안다. 위빳사나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에히 빠시꼬(ehi passiko)'이다. 와서 보라(Come and see). 직접 와서 철저히 경험한 뒤에 자기만의 판단을 내릴 것. 10일 코스가 끝난 이후의 결정은 각자 몫이다. 묶어두고 명상을 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없고, 천국을 담보로 의식이나 예배를 강요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에히 빠시꼬. 참고로 나는 가톨릭 신자이다. 그럼에도 내 종교와 담마가 상충되는 지점은 단 한구석도 없다.


수련을 마치고 담마코리아 정문을 나서면 누구나 툴박스를 하나씩 부여받는다. "자, 이 툴박스 이름은 위빳사나라고 해. 이건 앞으로 너의 삶에서 일어날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줄 거야. 단, 이 공구들을 쓰려면 넌 매일 꾸준히 수행을 해야 하고 아마 평생 동안의 단련을 필요로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이걸 쓸지 말지는 너의 선택이야. 그러니 효과를 원한다면 묵묵히 너의 일을 하렴. 그동안 담마는 담마의 일을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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