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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 Mar 30. 2024

이삿날에 대한 단상

개인적 수치심의 공간

그날은 이른 아침부터 안개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개월을 기다려온 날치고는 비교적 차분하고 음울하게 시작된 하루였다.

5년간 살던 집에서 드디어 이사가는 날이었다.


말하자면 그 집은 우리 가족이 '망하면서' 등 떠밀리듯 이사오게 된 집이었다.


기존에 살던 넓고 쾌적한, 채광이 잘되어 늘 실내가 밝고 산뜻했던 이전 집에서 산지 딱 10년째 되던 해에 그렇게 우리는 쫓겨나듯 급히 이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그 집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졸업했다. 10년 동안 살면서도 그 집이 특별히 좋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당연히 앞으로도 쭉 그곳에서 살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그 갑작스런 이사는 내게 큰 충격이었다.


이사가 결정되어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맞은편 벽을 바라보며 꺼이꺼이 울었다. 이 집이 너무 아까웠다. 그냥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우리 집이 한 순간에 남의 집이 될 거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의 소중함을 몰라준 것 같아서 미안한 감정마저 들었다. 집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한참을 울며 밤잠을 설쳤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그랬다.


새 집으로의 이사가 마무리되자 한층 더 심란해졌다. 앞, 뒤, 옆 다른 건물들로 꽉꽉 들어찬 골목에 위치한 우리의 새 집은 단 한 줌의 빛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곳에 처음 들어가서 느꼈던 절망감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늘 어둡고 음침했던 그 집에서 나는 거의 항상 우울하거나 울적했다. 특히나 추위를 많이 타는 내게 그 집은 거의 악몽과도 같았다. 화창하고 맑은 날에도 집에 있으면 몸이 움츠러들고 어딘가 모르게 참 쓸쓸했다.


집에 있는 것이 더 이상 휴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내 상처가 집 여기저기에서 갈 곳 잃은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그 후로 내 유일한 소망은 하루빨리 이 집을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살아보니 집의 크기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채광과 위생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는 곰팡이와의 전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는데, 승리자는 늘 내가 아닌 그쪽이다. 실로 빛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렇게 무려 5년을 살았다. 이사는 이전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갑작스레 결정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때보다 좋은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다.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으나, 집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은 존재한다던가? 결국 우리 가족은 5년만에 다시 채광 좋은 곳으로 이사올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던 이삿날이 드디어,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날씨는 흐려도 이삿날 내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행복할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곧 집에 도착해서 그간 차곡차곡 쌓아온 내 지난 삶의 흔적들을 깡그리 빼다 나를 것이라 생각하니 무언가 기분이 요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창피했다.


확실히 난 그 집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일로 인해 하루하루 기분이 좋은 적은 있었겠으나, 집에 대한 내 감정은 한결같았다. 생각해보라. 이런 감정을 지닌 공간에서 내가 쌓아올린 부산물들은 과연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 집에는 우리 가족의 아픔과 눈물이 서려있었다. 세 명이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의 고통을 투영하고 있던 그 집, 그 처참한 몰골을 타인에게 여과없이 공개한다는 사실이 정말 달갑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당시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수치스러웠다. 마치 지난 5년간의 게으름과 무기력과 우울을 타인에게 심판받는 기분이었다.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던 내 치부를 속절없이 들키게 된 것 같았다. 나는 도저히 이삿짐을 싸는 그 현장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강아지를 데리고 도망치듯 나와 새 집에 와 있었다.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새 집은 묘한 아늑함을 선사했다. 그곳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 생각했다.


옷이 작아보이는 건 털로 인한 착시현상이다.


지난 5년간 집안 구석구석에 우울함을 켜켜이 쌓아두고 있었던 것은, 오롯이 내 선택이었구나. 내가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나를 지배하도록 냅두고 있었구나. 집에 대한 내 감정과는 별개로 그 안을 구성하는 분위기는 언제든 바꿀 수 있었는데, 내 미숙함은 차마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저 집을 핑계로 내 분노와 우울함을 정당화하면,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수 있으니 손쉬운 그 방법을 선택했던 것일 수도.




새 집에 이사를 온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사실 이 글은 이사를 오고 두 달 뒤에 썼던 글이다. 당시에 이 글을 쓰는 것은 이전 집에서의 해묵은 감정들을 소화시키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다 쓰고 나니 어딘가 구질구질한 느낌에, 또 다른 수치심을 대면할 용기가 나지 않아 발행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취소해버렸다.


그 2년 동안 우리 강아지는 이 집에서 13년 간의 생을 다하여 떠났고, 이사와 동시에 시작한 상담사라는 새 직업은 이제 조만간 그만두게 될 예정이다. 이사 당시에는 새 집으로의 이동이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인생사 늘 그렇듯 이사 후에도 집으로 인한 이만저만한 사건들로 케케묵은 감정들을 대면하는 일들이 만연했다.


사람에게 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해본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가 대체 무어길래 이토록 수많은 감정들을 마주보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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