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박힌 마음이야.
억겁의 시간이라 느껴지던 사흘 그리고 한 달의 시간이 흘렀고 여러사람이 내게 건넨 푹 쉬라는 말과 무리하지 말라는 격려가 무색하도록 나는 유난히 빠르게 뛰는 신경에 몸을 가만히 두기 어려워 손과 발을 분주하게 놀렸다.
평소라면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청소기를 돌리거나 아주 간단한 음식을 하는 일, 잠을 자는 것 정도? 조금 더 보태자면 가끔 창 밖을 보며 사색을 하는 정도가 집에서의 전부였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말라버린 화분들을 모조리 뽑아다가 캠핑용 도끼로 절단하여 종량제에 버리는 일부터 베란다에 뿌옇게 낀 얼룩을 솔질하여 물청소를 하고 물자국을 없애려 마른수건 다섯 장을 걸레로 만들어 알뜰하게 분산하여 닦아내고도 성에 차지 않아 괜스레 주방 찬장에 들어있는 유리컵과 접시들을 모조리 꺼내어 세척하고 물기를 닦아 햇볕에 열을 맞춰 세워놓는 일까지 마친다.
의아한 점은 이렇게 아무리 일을 해도 몸에 열이 나지 않는 점이었고 몸을 움직일때마다 휙휙 들이차는 한기를 가시기 위해 턱 아래까지 올라오는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 입고서야 떨리는 몸을 진정 시켰다. 그제서야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목을 축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냉장실의 기운은 서늘하다 못해 한겨울 바람부는 호숫가 같았다.
순간 문을 왜 열었더라 잠시 목적을 잊은 채 그대로 눈의 초점이 나가버렸고 손끝이 얼듯이 아파왔는데 초점 잃은 눈앞으로 새빨간 김치통이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원체 몸집이 큰 통이기도 했지만 강렬한 신김치 냄새가 어디선가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 아무 생각할 틈 없이 바쁘게 잘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콕하고 박힌 당신이 빠져나갈 것도 같았는데,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냉장고 앞에서 차갑게 무너져 내렸다. 냉장고 앞에서 내가 목적을 잊어먹지만 않았어도, 그래 목이 말랐지. 내가 목이 마르지만 않았어도. 코감기라도 된통 걸려 냄새라도 못 맡았으면. 때마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아 음소거를 누른 채 전화를 받았다. 친구가 말했다. 그러다 너 죽어. 그럼 나 못살아. 집 앞에 너가 좋아하는 호박죽 놓고 왔어. 조금이라도 먹어. 듣고 있지? 나는 와르르 무너진 얼굴로 눈물을 쏟아내렸다. 아무래도 이 가슴에 박힌 가시는 조금 아프더라도 차갑더라도 잘 껴안고 지나야겠다는 결론에 당도했다. 내가 이러다 죽으면 당신도 못 봐. 친구도 안돼. 내가 살아야지. 지나가야지. 다음이 오지. 근데 콕 박힌 당신 내가 생각 안나도록 바쁘게 살면 툭 빠져나갈 줄 알았는데 아직인가봐. 떼고는 못가. 같이 가. 창밖으론 주홍빛 노을이 능선을 따라 잔잔히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부은 얼굴 때문인지 입이 잘 벌려지지 않았지만 죽을 먹었다. 한 술 두 술 목구멍으로는 넘어가는게 이정도면 살 수 있다 싶었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는데 까무룩 잠에 들었다. 새벽녘 적요만이 감싸는 집안 공기가 또 왈칵 나를 울릴 뻔했지만 나는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는 가사 떠올리기에 집중했다. 가시박힌 마음이야 죽 몇 술 먹으면 괜찮겠지. 그러다 한 숨 자면 또 시간은 흘러있고, 안 괜찮아도 언젠간 괜찮겠지.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