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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에도 자격이 있다, 격(case)

'문법은 당신의 머릿속에 산다'

by 정진

영어나 여타 언어를 공부하다 보면 '주격', '목적격'과 같은 말을 만난다. 여기에는 공통적으로 '격' 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는데 격이란 무엇일까? 격(case)은 명사나 대명사(체언)가 문장 어디에 위치하며 어떤 역할을 맡는지와 관련한 개념으로 형태 변화를 동반하기도 한다. 가볍게 말하면 격이란 문장에서 어떤 명사가 맡는 역할을 나타내는 문법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격은 명사가 문장에서 주어의 역할을 부여받은 상태를, 목적격은 목적어 역할을 부여받은 상태를 말한다. 참고로 여기서는 눈에 보이는 형태와 관련된 격을 다루고 있는데 이를 더 정확히 하면 '형태론적 격'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격이 문법적 장치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 격은 해당하는 명사의 본질적, 실질적인 의미는 바꾸지 않고 기능적인 의미만을 더하고 바꾼다. 즉, 의미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문법적 관계만 표시되기 때문에 문법적 장치인 것이다. 영어 인칭대명사를 예로 들어보자.

영어 인칭대명사의 격

1. 주격(nominative case):He, She, They (그, 그녀, 그들 +이/가)

2. 속격(genitive case, 소유격):His, Her, Their (그의, 그녀의, 그들의 + 명사)

3. 대격(accusative case, 목적격): Him, Her, Them (그를, 그녀를, 그들을)

남성 3인칭 대명사인 'He'(그)는 주격, 속격, 대격을 받으면서 형태가 바뀌지만 그렇다고 3인칭 남성 단수 대명사인 뜻이 변하지는 않는다. 'She'나 'They'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격에 따라 문장의 의미관계가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He loves her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와 'She loves him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이라는 두 문장은 같은 등장인물을 출연시키고 있지만 He와 She가 각 문장에서 맡은 역할에 따라 주격과 대격 사이에서 교체되며 문장의 의미가 달라진다.


흔히 소유격이라고 부르는 속격을 살펴보자. 명사의 경우 익숙한 -'s를 붙여서 속격형을 만든다. 즉, HE가 'His'로 변해서 '그의' 라는 의미의 속격형이 되는 것 처럼 'Kevin'에 -'s를 붙여 'Kevin's(케빈의)'를 구성한다. 한편 -'s는 재미있게도 '색슨 속격 Saxon genitive'이라고 불리는데 고대 영어 전통에서 비롯된 형태소라는 뜻이다. 인칭대명사 속격과 명사 속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반면 인칭대명사의 경우 위 표와 같이 체계적인 형태적 변화를 거친다.


영어 인칭대명사 속격과 명사 속격형 비교

1. His desk, Her car, Their school (인칭대명사 속격형)

2. Kevin's desk, Shelly's car, Criminals' school (명사의 속격형)


고대 영어와 비교하면 현대 영어의 격 변화는 다행히도 아주 간단한 편이다. 현재 영어의 경우 인칭대명사를 위주로 한 격 변화가 사실상 전부이다.


한국어의 격 현상은 영어에 비해 더 복잡하다. 격은 많은 언어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그 양상과 표면상 출현 정도가 다르다. 학교문법에 따르면 한국어엔 주격, 목적격, 관형격, 보격, 부사격, 서술격의 여섯가지, 혹은 호격을 더한 일곱가지 형태론적 격이 존재하고 대개 격조사의 형태로 실현된다. (다만 김용하 등 (2018)에 따르면 학교문법의 격 체계는 여러 문제가 있다.)

한국어의 일곱가지 격

1. 주격 (-이/가, -로서, -에서)
2. 서술격 (-다, -이다)
3. 대격/목적격 (-을/를)
4. 관형격 (-의)
5. 보격 (-이/-가) (되다, 아니다와 같이)
6. 부사격 (-에게, -에게서, -에서, -로, -로서, -로부터 등)
7. 호격 (-아/-야/, -여/이여)


한국어 모국어 화자라면 아마 한국어 예시를 통해 격 개념을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좋을 것이다. 위에서 격은 문장 안에서 할당된 의미를 표시하지만 어휘의 본질적, 실질적 의미를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이를 한국어 예시와 함께 확인해보자. 다음은 '유연'이라는 가상의 사람을 중심으로 만든 예문 세트이다.


격의 문법성(기능성)

1. 유연이가 노래를 부른다. (유연이가, 주격)
2. 지민이가 유연이를 불렀다. (유연이를, 대격)
3. 이 초코케이크는 유연이의 초코케이크이다. (유연이의, 관형격)


1, 2, 3번 문장에서 '유연'이 맡은 역할은 각각 주어, 직접목적어, 관형어로 달라진다. (참고로 관형어는 체언-명사적 성격 어휘군-을 수식하는 말이다.) 하지만 '유연'이라는 사람의 실질적, 본질적 의미는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격은 문장 안에서 나타나는 역할을 표시하는 문법적 장치로서 문장에 참여하는 객/주체들의 질서를 정리한다.


격은 굉장히 언어 내적, 문법적인 요소지만 언어 생활에 필수적이다. 가령 '*유연이가 노래가 부른다'라고 말하면 격이 부적절하게 할당되어 문장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막연하게 보이는 원리가 나도 모르게 나의 말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이 언어의 재밌는 점이다.


참고문헌


김용하 외. (2018). 한국어 생성 통사론. 역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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