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은 당신의 머릿속에 산다'
시제(Tense)는 문장에서 시간관계를 표현하는 문법적 장치이다. 영어나 국어를 공부하다 보면 과거시제나 현재시제 말고도 과거완료나 미래완료, 과거 완료 진행 시제 등 복잡한 시제가 등장하곤 한다. 심지어 영문법 교과에선 종류별로 12개의 시제가 제시된다. 인간의 인지에서 시간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생각하면 시제는 어떤 언어를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시제의 개념이 너무 복잡해져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1. 시제는 문법적 장치
앞에서 시제를 시간관계를 표현하는 문법 장치라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시제가 어디까지나 '문법적' 장치라는 것이다. 시간 관계는 사실 '1432년 겨울에', '세종 1년에', '20세기 내내', '어제' 등 문법 외적, 어휘적으로도 표현된다.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내가 어제 소고기를 먹었어.
이 문장에서 시간 관계를 나타내는 부분은 모두 둘로 '어제'와 과거시제 표지 '-었'이다. 여기서 '어제'는 어휘적인 방법이지 문법적인 장치가 아니다. 반면 '-었'은 과거시제를 나타내는 체계적인 방법, 즉 문법적 방법이기 때문에 시제이다. 문법적 방법인 시제와 비시제 표현을 비교하는 기준 중 하나는 그것이 닫힌 범주(closed class)에 속하는지, 아니면 개방 범주(open class)에 속하는지 여부이다. 닫힌 범주와 개방 범주의 구별은 시제는 물론 어휘 전반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닫힌 범주에 해당하는 성분은 특정 언어 안에서 보통 문법적, 기능적 역할을 맡아서 수행하는며 그 구성성분이 시간이 흘러도 잘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어의 전치사 (to, for, of...)나 한국어 조사(이/가, 께서, 에서...), 시제표지(-었) 등을 생각해보면 쉽다. 물론 오랜 시간이 흐르면 이런 기능적 요소 또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역동적으로 변화를 겪는 어휘와 비교하면 이 불변성은 좀 더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영어 동사 'like'를 생각해 보자.
I liked your latest Instagram story.
(네가 방금 올린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좋아요 눌렀어)
여기서 'like'는 단순히 '좋아하다'가 아닌 '좋아요를 누르다'일 것이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이나 다른 SNS가 등장하기 전에는 이 뜻과 용법이 있었을까? 그리고 명사 'Instagram'은 또 어떤가? 1990년에도 존재하던 단어일까? 아니다. 이처럼 개방 범주에 속하는 어휘는 꽤나 짧은 시간 내에 변하거나 생길 수 있다. 반면 동사의 과거를 나타내는 과거시제 표지 '-ed'나 1인칭 대명사 'I'의 경우 'like'가 변하는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처럼 문법 기능적인 역할을 주로 담당하는 기능 범주는 잘 변하지 않는다. 시제처럼 닫힌 범주에 속하는 어휘는 인칭 대명사 (he, she...) 전치사(on, to, for...), 한국어 조사(이/가, 은/는...) 등이 있다.
2. 발화시를 통해 생각하기
시제와 관련한 중요한 개념을 하나만 소개하자면 '발화시(Speech Time)'를 꼽을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화자가 특정한 문장을 말한 시점이다. 여기서 발화시가 기준이 되는지 여부에 따라 시제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발화시를 기준으로 사건이 전, 후에 나타났음을 표시한다면 절대시제(absolute tense), 그 외의 기준을 채택하는 경우 상대시제(relative tense)라고 부른다. 절대시제와 상대시제를 알 수 있는 좋은 예시로 다음과 같은 안은문장이 있다.
수철이는 커피를 마시는 수민이를 불렀다.
이 문장은 바깥의 안은 문장(혹은 주절, matrix clause)과 거기에 안긴 문장(혹은 종속절, subordinate clause)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은 문장은 '수철이는 X를 불렀다' 이고 이에 의존하는 안긴 문장 X는 '커피를 마시는 수민이'이다. 수철이가 수민이를 부른 그 시간인 사건시와 위 문장이 발화된 지금, 즉 발화시를 비교할 때 수민이를 부른 사건이 문장이 말해진 것 보다 앞서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 예문은 절대시제상의 과거시제 문장이다.
하지만 안긴문장 '커피를 마시는 수민이'를 수철이가 수민이를 부르던 그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 해석한다면 안긴 문장이 현재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는'으로 인해 1)수민이가 커피를 마시는 사건과 2)수철이가 수민이를 부르는 사건이 같은 시점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화시 이외의 다른 기준을 도입하면 시제를 상대시제적으로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시제를 다룰 때 발화시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화자가 문장을 내뱉는 '그 순간'이 있고, 따라서 어떤 문장도 시간과 독립적으로 발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발화시, 시제, 과거 등 여기서 다뤄지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닌 인지적인 시간임을 유의해야 한다. 언어에서의 시간은 물리학적 시간과 아예 다른 대상일지도 모른다.
3. 그래서 영어의 시제는 몇 개?
이를 바탕으로 다시 영어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 보자. 영어 동사는 일반적으로 동사의 형태 변화를 통해 시제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work'라는 동사는 현재형에서 주어의 수에 따라 'works' 와 같이 어미 -s를 취하고, 과거형에서는 'worked'와 같이 -ed가 붙는다. 이러한 변화는 형태적 시제 체계를 구성하며 '-었'이 붙는 한국어의 예시와 같이 문법적, 체계적으로 시간 관계를 반영한다.
미래의 경우, 영어는 'will'과 같은 조동사를 통해 미래를 표현하지만 이 자체는 동사의 형태 변화가 아니며 어휘와 표현적 조합을 통해 작동한다. 따라서 미래 시제를 독립된 시제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영어 시제는 과거시제와 현재시제 뿐일까? 맞다. 하지만 현재형이 문맥에 따라 미래를 포함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를 현재 시제보다는 비과거 시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렇게 되면 영어의 시제는 과거시제와 비과거시제 둘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She goes to school tomorrow'라는 문장에서 동사 'goes'는 형태상 현재형이다. 하지만 어휘적인 시간 표현인 'tomorrow'를 통해 이 문장이 미래의 사건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영어의 현재형은 미래 시제를 포함할 수 있는 유연한 기능을 가지므로, 현재형은 곧 비과거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영어의 시제는 과거와 비과거라는 이분법적 체계로 이해할 수 있으며 시제 표현과 시간 표현을 구분함으로써, 영어의 시제 체계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4. 현재 완료 시제? '상(aspect)' 분리하기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다 보면 '현재 완료 시제' 라는 개념을 보게 된다. 이외에도 미래 완료 시제, 현재 완료 진행 시제 등 여러 조합이 있다. 이를 모두 합쳐 보통 '12시제'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조합을 과연 시제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예시로 기본적인 현재완료 형태를 살펴보자.
영어 현재완료 구조는 'have + 과거분사(p.p,)'로 구성된다. 앞에서는 이를 두고 현재 완료 '시제'라고 표현했지만 have로 표현된 구조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상(aspect)'이라는 별도 범주로 분류해야 한다. 상이란 시제처럼 문법 범주의 한 종류인데 어떤 사건/사태가 펼쳐지는 양상/방식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표현한다. 즉, 상은 어떤 사건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표현하지만 사건이 시간 축 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시제의 역할이다. 설명이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다음의 예시를 보자.
I have spent 50 dollars.
난 50달러를 썼어.
예문에서 현재완료 구조에 해당하는 'have spent'에 주목해보자. 현재완료 'have spent'가 만약 동사의 단순 과거형인 'spent'로 바뀌었다고 해도 내가 50달러를 쓴 그 시점 자체가 시간 축 위에서 바뀌는가? 앞서 말한 발화시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다만 해당하는 사건이 발화시 기준 과거라는 범위 내에서 과거 경험, 상태 지속 등 추가적 의미와 함께 나타날 뿐이다. 즉, 현재완료 'have spent'가 'spent'와 다른 점은 사건이 현재와 관여되어있다는 속성이지 시간 선 위에서의 위치가 아니다. 따라서, 완료상은 시제와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다. 완료를 포함해 상에는 이외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다른 대표적인 (영어) 예시로는 be+ing의 형태를 지니는 '진행상'이 있다. (따라서 진행 또한 시제가 아니다)
이렇게 시제와 상을 별도로 분리하여 보는 것은 12시제 [(과거+현재+미래)x(진행+완료+완료진행+단순형)]보다 더 정확할 뿐 아니라 더 단순하다. 앞서 설명했듯 시제를 고립시켜 정의하면 보통 과거시제와 비과거시제 단 2가지만 인정된다. 이를 별도의 개념인 상과 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여러 구문으로 연습하는 것이 '12시제'의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익히는 것 보다 간단하지 않을까? 이 방식은 정확할 뿐 아니라 익숙해지면 영어는 물론 한국어나 기타 언어 파악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글은 언어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교과교육학이나 현장의 다른 문제를 놓치고 있을 수 있다. 다만 내가 학생일 때 느낀 것과 같은 시제 개념의 복잡함을 더 정확하고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면 교육적 효용도 향상될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박진호. (2011). 시제, 상, 양태. 國語學, 60, 289-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