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은 당신의 머릿속에 산다'
언어 교육, 특히 영어교육에서 문법은 필수적일까? 국가의 공식 교육과정은 물론 대부분의 시중 교재와 커리큘럼이 문법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것 같다. 반대로 회화나 원어 노출, 사용을 강조하는 입장을 보면 문법은 일종의 죽은 지식이나 자신감 있는 언어 사용을 저해하는 요소로 비치기도 한다. 인터넷을 이용하다 보면 문법을 지양하고 컨텐츠와 놀이를 통한 자연스러운 노출, 발화 기회 확보 등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영상이나 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이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어 교육에 있어서 문법은 효과성과 내용적 필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법 번역식 교수법(Grammar Translation Methods)은 가장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외국어 교수법이다. 문법을 교사와 학생의 모국어로 지도하고, 해석해보는 연습이 주가 되는 학습법이다. 이 글에서 꼭 문법 번역식 교수법만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모국어를 활용한 명시적인 문법 지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논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이해 해주길 바란다.
한국에서 문법 번역식 교수법은 최근 소통중심 교육 담론이 대두되며 그 위상이 낮아지고 있다. 이를 포착한 연구도 있다. 정소영 (2010)은 중국어 학습 연구에서 의사소통중심 교수법(CLT)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기존 구조주의적 교수법과 문법 번역식 교수법의 중요성이 떨어져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설문조사 및 실험법을 활용한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현직 교사에게 문법 번역식 교수법이 가장 인기 있었으며 그 주된 이유는 강의 편리성과 의사전달 명확성이었다. 이러한 선호엔 합리적 측면이 있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제외한 언어는 대부분 이중 언어(L2)가 아닌 완벽한 외국어로 취급된다. 게다가 한국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가 통용되는 환경도 아니다. 또한 언어학적으로 보면 영어를 위시한 주요 외국어는 언어 계통적으로 한국어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문법 및 내용적 지도 없이 학생들이 원어를 바로 접하면 이를 쉽게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현장 교사들이 모국어를 활용해 명확한 내용 전달과 피드백 제공이 가능한 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Krashen (1987)의 입력 가설(the input hypothesis)은 명시적 문법 학습을 거부하는 입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Krashen은 의사소통적 언어학습이나 자연스러운 노출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가장 즐겨 인용하는 학자이며 한국어 자막이 달린 강연 영상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
Krashen에 따르면 언어 능력이란 입력을 통해 내재적으로 획득되는 것으로 의식적 학습(learning)보다는 자연적 습득(acquisition) 과정이다. 이에 따르면 학습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 보다 약간 더 복잡한 외국어 입력, 즉 이해 가능한 입력 (comprehensible input)을 기존 지식을 통해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해당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명시적 문법 지도는 그 효용성이 없는 것으로 제시된다. Krashen의 외국어 습득 과정은 언어 습득 장치(LAD)를 전제한 모국어 습득 과정과 유사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언어 습득은 연령에 따라 균질적이지 않다.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 가설에 따르면 모국어 수준 유창성에 도달할 수 있는 언어 습득 기능은 연령이 상승함에 따라 점점 사라진다. 배영남 (2003)은 교수법에 대한 연구에서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를 고려할 때 12에서 13세가 되면 이미 언어학적 성인기에 접어들어 본격적 영어 교육이 시작되는 중학교 이상의 과정에서 이러한 생득적 언어 습득을 기대하기 어려움을 지적한다. 또한 Moskovsky (2001)는 언어적 결정적 시기에 대한 연구를 검토하며 제 1언어(모국어)와 제 2언어 습득은 본질적으로 다른 과정임을 강조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아주 어린 연령대를 지난 경우 모국어와 다른 언어 학습 방식이 요구된다. 또한 앞서 밝힌 것처럼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외국어 교육, 특히 그 규모와 중요도가 높은 영어 교육의 경우 한국에서 해당 언어가 쓰이지 않는다는 환경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Krashen의 모델은 기본적으로 목표 언어 입력이 풍부하게 제공됨을 전제한다. 하지만 목표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국가에서 외국어로서 그 언어를 배워야 한다면 입력의 절대량 자체가 부족할 수 있다. 따라서 명시적 문법 지도를 거부하는 자연주의적 입장은 언어 습득엔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사실과 한국과 같은 EFL 환경을 함께 고려할 때 한계를 보인다.
문법 지도가 필요한 이유는 앞서 설명한 효율성과 효과성에만 있지 않다. 인간 생활의 중추 중 하나인 언어의 가장 큰 특징은 문법 시스템을 가진다는 것이다. 물론 학습 문법과 인간 특유의 언어기관(Faculty of Language)의 운용 원리로서의 이론적 문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엄태경 (2016)은 교재의 문법적 설명을 언어학 이론적 문법과 구별해 교육 문법(Pedagogical Grammar)의 일종인 학습 문법(Learning Grammar)으로 규정한다. 학습 문법은 해당 언어 학습이라는 목표를 위해 설계된다는 측면에서 기술 문법(Descriptive Grammar)의 모든 사실을 포함하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엄태경은 같은 연구에서 학습 문법도 언어학적 이론의 측면에서 부정확한 설명으로 간주될 정도의 일반화나 단순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양해야 함 또한 지적한다.
이처럼 명시적인 문법 지도와 학습은 중요한 사항이다. 앞서 살펴봤듯 있는 모국어 능력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으며 모국어 학습처럼 자연주의적 방식을 따라 문법을 명시적으로 지도하면 안된다는 입장에 의심스러운 지점도 많다. EFL 환경인 한국의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이를 고려하면 문법 교육은 효과적, 효율적이지만 그 실용성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법은 언어에 추상적인 질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지적 시발점이다. 언어가 인간의 중요한 사고와 소통의 도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언어에 대한 지식인 문법은 생각과 소통을 한 발 물러서서 파악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법교육만으로 외국어가 완성되지 않는다. 많은 사용 기회와 원어 노출이 필수적이다. 다만 문법도 사용과 연습에 못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정소영. (2010). 교수법 차이에 따른 초급 중국어 학습 효과의 효율성 비교 분석. 중어중문학, 46, 231-253.
배영남 (2003). 5형식 문형 이론과 영어 문법 교육. 언어과학연구, 24, 83 - 110.
엄태경. (2016). 영문법 학습 교재의 5문형 분류 체계.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6(6), 283-292.
Krashen, S.D. (1987) Principles and Practice in Second Language Acquisition. Prentice-Hall International, Upper Saddle River.
Moskovsky, C. (2001). The Critical Period Hypothesis Revisi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