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세계
단어(word)란 무엇일까요? 단어라는 개념은 사실 너무 쉬워서 따져 물을 필요도 없이 그 정체를 모두가 알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단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단어라는 말에도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단어는 처음 듣는데?' '요즘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어', '모르는 단어는 좀 찾아봐' 와 같은 문장을 자연스럽게 말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문장들 자체도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는 화자(speaker)들이 단어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든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어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누군가 단어와 단어가 아닌 단위를 구별하기 위해 글에서 띄어쓰기를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책’, ‘안경’, ‘사람’, ‘bookstore’는 띄어쓰기가 없이 붙어 적었기 때문에 하나의 단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bookstore’처럼 [파는 물건+가게]의 구조를 가진 ‘clothing store’는 띄어쓰기로 표기합니다. ‘산사람’은 어떨까요? 만약 띄어쓰기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산 사람’이라는 표기는 ‘산’과 ‘사람’이 별도의 단어라는 의미이고 ‘산사람’이라는 표기는 ‘산사람’이 그 자체로 단어라는 증거가 될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띄어쓰기를 항상 생각하고 말할까요?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문자와 표기법은 말로 표현되는 언어를 옮겨 적은 체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언어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단어라는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 문자와 표기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선후관계가 뒤집힌 일입니다. 게다가 정책적 언어 규범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짜장면’은 규범에 의해 ‘자장면’으로 적히곤 합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자장면’ 으로 발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 지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표기법이나 띄어쓰기처럼 고정된 자료는 너무 간접적이어서 믿을만한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단어의 정체를 알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언어 직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란 본디 우리의 정신 안에서 작동하는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글과 표기를 통해 외부화한 자료는 많은 경우 직관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 할 만큼 왜곡되거나 규범, 정책의 영향을 크게 받곤 합니다. 따라서 독자 여러분이 가진 언어에 대한 미묘한 감각은 생각보다 믿을만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다소 형식적인 정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언어 직관이 믿을만한 기준이긴 하지만 눈 앞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애매한 사례가 너무 많아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대한 많은 자료를 포괄할 수 있는 믿을만한 정의를 찾아 앞으로 펼쳐질 단어에 대한 논의에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가장 유명한 단어의 정의는 20세기 초반의 미국 언어학자 레오나드 블룸필드 (Leonard Bloomfield, 1887-1949)가 내린 것입니다. 블룸필드는 단어를 단독으로 쓰일 수 있고 이웃 요소에 의존하지 않는 ‘최소 자립형(a minimum free form)’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여기서 단어가 자립(free)한다는 말은 어딘가에 매여(bound)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립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 답변 테스트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어진 질문에 대해 단독으로 완전한 대답을 이룰 수 있는 단위는 자립하는 단위이며 따라서 단어의 지위를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질문-답변 자립성 테스트
Q1: Whose family came to your house?
(누구네 가족이 집에 왔어?)
A1: Alice’s.
(엘리스네)
Q2: Who came to your house?
(누가 집에 왔어?)
A2: Alice.
(엘리스)
예시에서 보듯 누구네 가족이 집에 왔었냐는 물음(Q1)에 ‘Alice’s (엘리스네)’ 라고 짧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족 단위가 아닌 집에 방문한 개인에 대해 묻는 두 번째 예시 (Q2)에서는 개인의 이름인 ‘Alice(엘리스)’ 라는 대답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자립하는 대답, 즉 ‘Alice’s’와 ‘Alice’는 모두 단어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A1)에 쓰인 ‘Alice’s’라는 단위는 ‘Alice’라는 이름 외에도 다른 요소, 즉 소유격 표지 ‘-s’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립하는 최소단위라는 블룸필드의 정의를 만족하는 단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단어의 구성이 복합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최소 자립형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Alice’s’의 구조는 앞서 설명했듯 고유명사인 이름 ‘Alice’와 소유격 표지 ‘-s’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요소 중 자립 가능하여 하나의 발화로서 독립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요소는 단 한 개, 즉 고유명사 ‘Alice’ 뿐 입니다. 소유격 표지 ‘-s’는 단독으로 사용 불가능하며 이웃한 다른 요소인 ‘Alice’에 크게 의존합니다. 따라서 ‘Alice’s’는 이 기준에서 볼 때 단어의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가요? 단어에 대한 블룸필드식 정의가 만족스러운가요? 사실 다소 직관에 어긋나 보이는 부분이 있음은 물론 이 규정을 탈출하는 사례가 너무 쉽게 등장합니다.
영어에는 단독으로 쓰이기 어려우나 직관적으로 단어 취급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부정관사 a와 정관사 the는 발화에서 ‘Alice’처럼 독립적인 대답으로 쓰이지 못합니다. 문법적으로 반드시 다른 명사적 요소와 결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래 예시에서 볼 수 있듯 a나 the는 서로 자리를 바꾸거나 this, that과 교체될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질문-대답 테스트를 기준으로 본다면 독립적이지 않은 요소이지만 문장 구조에서는 독립적으로 행동합니다.
(2) 관사의 구조적 독립성
A car
The car
This car
That car
이와 같은 관사, 지시사의 독립된 행동을 포괄하기 위해서 최소 자립형에 의존한 기준에 문장 내에서의 이동 가능성, 타 요소와의 분리 가능성을 추가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위에 제시된 관사와 지시사는 모두 문장 안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 가능하고 후행하는 명사(이 경우에는 car)에 의존적이긴 하지만 엄연히 분리 가능합니다.
마르샹(Marchand 1969)은 블룸필드에 기반해 이러한 이동 및 분리 가능성을 추가적으로 고려한 분석을 제안했습니다. 마르샹에 따르면 단어란 의미 있는 말 중, 문장 안에서 자리 이동이 가능하고,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해 최소적이며, 독립적인 단위를 말 합니다. 이동 및 분리 가능성과 관련하여 고립 가능성(Isolability)을 도입할 수도 있습니다 (Hokett 1958). 찬찬히 읽어보면 이 정의는 블룸필드의 ‘최소 자립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구조적인 위치, 즉 이동 가능성이 추가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 책에서 논의를 펼치기 위해 간단한 정의를 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정의는 부정확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논의를 위한 기초로 두도록 합시다. 이 정의를 벗어나는 사례를 찾거나 설명들 사이의 모순을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3) 단어의 임시적 정의
단어란 자립 가능한 최소 단위이거나 (블룸필드식 정의)
문장 안에서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한 단위 (이동 가능성)
이제까지의 논의는 블룸필드의 생각에 기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블룸필드의 정의는 비교적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블룸필드는 사실 단어보다는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인 형태소(morpheme)에 집중했으며 단어의 정의에 있어서는 충분히 일관적이지 않기도 했습니다.
위에 설명한 블룸필드식 단어 정의에는 단적으로 어근과 어근이 합쳐진 합성어(Compound word)와 충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합성어는 단어의 형성방식에 따른 분류 중 하나로 두 개 이상의 어근(root)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복합어 중 한 갈래입니다. (단어의 종류에 관해서는 뒤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커피우유’는 ‘커피’라는 어근과 ‘우유’라는 어근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도입부에 나온 예시인 ‘bookstore’도 마찬가지로 ‘book’과 ‘store’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최소 자립형’이라는 정의를 문자 그대로 따른다면 ‘커피우유’와 ‘bookstore’는 추가적인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최소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블룸필드가 합성어를 단어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블룸필드에게도 합성어는 분명 기능적으로 단어였고 내부적 구조를 가졌으나 분명히 문장에서 다른 단어와 같이 단어로서 행동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최소 자립형’이라는 기준도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일관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룸필드가 ‘최소’라는 말을 덧붙인 데에는 합리성이 있습니다. 만약 최소성 기준이 없으면 단어보다 문장에 가까운 단위인 구(phrase)와 단어를 구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가령 ‘커피우유’는 단어이지만 ‘디카페인 커피우유’ 혹은 ‘디카페인 허니 아이스 커피우유’처럼 요소가 점점 늘어나 구에 가까워진 단위가 있을 때 최소성 기준 없이 단어와 구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