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세계
지금까지의 다소 이론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게 좋을지 생각해 봅시다. 앞선 정의를 다시 한 번 간단히 말해보면 단어란 단독으로 사용 가능 하거나 문장에서 구조적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제는 실제 단어들이 우리 마음속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실제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지 살펴볼까요?
이를 위해 새로운 개념인 어휘소(lexeme)과 어형(word-form)을 소개하겠습니다. 어휘소란 낱말을 뜻하는 ‘어휘’와 무언가를 이루는 낱낱의 요소를 이르는 ‘원소’의 ‘-소’를 결합한 말 입니다.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달리다’, ‘sleep’ 등의 개별적 어휘를 개념적으로 부르는 말 입니다. 이 용어는 단어의 독립성을 원자에 빗대어 묘사한 것입니다. 반대로 실제 문장에서 해당 단어가 문법적 맥락에 맞추어 출현하는 것을 어형이라고 부릅니다. 즉, 어휘소는 추상적 어휘항목을, 어형은 실제로 실현되는 단어의 형태를 나타냅니다.
원어민 화자는 ‘달리다’, ‘sleep’과 같은 단어의 기본적 형태, 즉 어휘소를 알고 있으면서도 문장의 환경에 따라 적절한 형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어를 적절하게 묘사하기 위해 근원적 단어 원자인 어휘소와 어형 변화에 대한 체계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다음 표 입니다. 이러한 표를 어형 변화표(Paradigm)라고 부릅니다.
(4) 영어 동사 CATCH와 SLEEP의 어형 변화표
기본형 Catch Sleep
3인칭 단수 주어 현재시제 Catches Sleeps
현재 진행 형태 Catching Sleeping
과거형 Caught Slept
과거분사형 Caught Sl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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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추상적인 어휘 목록인 어휘소는 (4)에 나온 것 처럼 전부 대문자로 적습니다. 어형 변화표를 보면 동사 CATCH는 기본형 ‘catch’, 3인칭 현재 단수 주어 환경에서 -es가 붙는 굴절을 반영한 ‘catches’, 현재 진행 형태 ‘sleeping’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SLEEP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SLEEP의 경우 과거형과 과거분사의 형태가 ‘sleeped’등이 아니라 ‘slept’로 불규칙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정보 또한 어형 변화표에 의해 포착되고 있습니다.
이젠 한국어를 살펴볼까요?
(5) 한국어 동사 ‘달리다’의 어형 변화표
기본형 달리다
어간 달리-
과거형 달렸다
청유형 달리자
관형형 달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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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의 표를 보면 ‘달리다’라는 기본적인 동사가 ‘달리-‘라는 어간을 바탕에 두고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이지만 기본 어휘, 특히 형태적 변화가 큰 동사나 형용사에 대해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명시적인 지식으로, 학습을 통해서 배운 지식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마치 걷는 법을 알거나 음의 높낮이를 아는 것 처럼 몸에 배어있는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의 단어, 가령 (5)에 예시로 든 ‘달리다’의 개별적 형태를 하나하나 다 저장하고 있다는게 의심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규칙을 저장하는게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영어에서 ‘3인칭 단수 주어 현재시제 주어 뒤에 오는 동사에는 -s를 붙여라’ 라던가, 아니면 한국어 동사 청유형을 만들려면 어간 뒤에 ‘-자’를 붙여라’ 처럼 말이죠.
맞습니다. 대부분의 어형 변화가 규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각각의 형태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모든 단어 형태를 일일히 저장하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위의 어형변화표는 규칙에 의해 생성된 체계적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며 (4)에 나온 두 동사, catch와 sleep을 다시 살펴봅시다. 이 두 단어는 3인칭 단수 주어가 오는 현재시제 구문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작용을 겪습니다. ‘catch’에는 ‘-es’가 붙어서 ‘catches’가 되었고 ‘sleep’에는 익숙한 ‘-s’가 붙어 ‘sleep’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불규칙해 보이는 경우도 규칙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요?
사실 ‘-es’와 ‘-s’는 같은 형태소의 다른 표면적 형태입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형태소를 간단히 정의하면 ‘의미를 가진 언어의 최소단위’ 입니다. 여기에는 단어의 경우와 달리 자립성 기준이 없습니다. 즉, 형태소를 구별할 때에는 그 성분이 존재하여 전체 단위에 의미적 기여를 하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두되 단독으로 사용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es’와 ‘-s’는 사실 같은 형태소이고, 표면적 형태만 다르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형태소는 단어나 음운과 같은 다른 언어 단위와 같이 심리적 실재입니다. 심리적이면서 실재적이라니, 아이러니하죠? 심리적이라는 말은 우리 마음 혹은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말이고 실재한다는 말은 하나의 단위로서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그 존재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형태소는 이형태(allomorph)의 집합으로 존재합니다. 어려운 말이지만 한국어 조사 예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주격조사 ‘-이/가’는 형태가 둘이지만 그 의미는 하나입니다. 바로 주어의 문법적 자격을 표시한다는 기능적 의미입니다. 하지만 한국어 화자는 주격조사를 고를 때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합니다. 이때 어떤 기준에 따라 조사를 고르게 될까요?
(6) 주격 조사 ‘-이/가’
민수가 학교에 간다.
*민수이 학교에 간다.
민정이 학교에 간다.
*민정가 학교에 간다.
예시 (6)을 보면 ‘-이’와 ‘-가’는 주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에 따라 분포가 정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격조사가 표시하는 이름의 소리 구조에 따라 어떤 형태가 올지 정해지는 것입니다. 주격조사 중 ‘가’ 형태는 앞 말이 모음으로 끝날 때 출현합니다. 즉, 주격 조사에 의해 표시되는 이름 혹은 명사가 받침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다른 많은 예시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7)
학교가 시험문제를 냈다.
민수가 김밥을 만들고 있다.
컴퓨터가 고장났다.
철수가 물을 마신다.
주격조사 중 ‘이’ 형태는 반대로 앞말이 자음으로 끝날 때, 즉 받침을 가지고 있을 때 나타납니다. 이 역시 아래 예시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8)
술이 달다.
학생이 대답했다.
책이 어렵다.
교장선생님이 머리를 깎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한국어 주격조사의 두 형태, ‘-이’와 ‘-가’는 완전히 같은 의미와 기능을 지닙니다. 이때 ‘-이/가’는 같은 주격조사의 이형태라고 말합니다. 즉, 한국어 주격조사 ‘-이/가’는 하나의 성분이지만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환경에 따라 하나의 형태로만 실현됩니다.
이 개념은 DC코믹스의 히어로 배트맨(Batman)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배트맨은 사실 억만장자이자 기업의 상속자인 브루스 토마스 웨인 (Bruce Thomas Wayne)이 수트를 입고 활동할 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작품 속 사람은 둘을 다른 인물로 인지하겠죠? 여기에 따르면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은 그저 각자 살아갈 뿐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거나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날 한 시에 같은 공간에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은 결코 같은 시간과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둘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형태소 이야기로 돌아오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은 마치 한국어 주격조사 ‘-이/가’처럼 하나의 집합을 이루는 어떠한 실체입니다. 즉, 하나의 인물이 가지는 두가지 얼굴인 샘이죠. 이때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은 이 집합의 하나의 단면, 즉 이형태를 상징합니다. 이 동일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활약할 때에는 배트맨이라는 모습으로, 회사에 출근하거나 회의에 참석할 때에는 브루스 웨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죠. ‘-이/가’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자, 멀리 돌아왔습니다. 그럼 다시 ’-s’와 ‘-es’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결론부터 말하면 ‘-s’와 ‘-es’ 또한 음운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이형태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굴절에 따라 나타나는 ‘-s’에는 [s], [z], [ɪz]라는 세 가지 소리로 표현되는 이형태가 있습니다. 배트맨은 두 개의 모습이 있지만, 이 형태소는 세 개의 모습이 있는 샘이죠. 그리고 각 이형태는 해당하는 환경일 때에만 나타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규칙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유성음과 무성음, 치찰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유성음은 [z]처럼 성대 울림이 있는 소리, 무성음은 [s] 처럼 성대 울림 없이 바람의 마찰로만 소리가 나는 소리입니다. 치찰음은 좁은 공간을 공기가 마찰하며 지나가 형성되는 소리를 말 합니다.
(8)
a.[s] 무성음 뒤(voiceless) /p, t, k, f, θ/
예: stops, eats, laughs
b. [z] 유성음 뒤(voiced) /b, d, g, v, ð, m, n, ŋ, l, r/ 및 모음
예: plays (/플레이-ㅈ/), calls (/컬-ㅈ/)
c. [iz] 치찰음 뒤(sibilants) /s, z, ʃ, ʒ, tʃ, dʒ/
예: kisses(/키시-ㅈ/), pushes(/푸쉬-ㅈ/)
따라서 표면적인 불규칙함도 일정한 규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습니다. ‘catches’와 ‘sleeps’는 불규칙한 변화가 아니라는 말이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단어는 자립 가능한 최소 단위 혹은 문장 안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단위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단어의 형태적 정보를 어형 변화표(paradigm)의 형태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는 환경에 따라 각 단어가 실현되는 형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형 변화표에 나타난 모든 정보가 머릿속에 각각 저장되어 있을 필요는 없으며 많은 부분 규칙에 의해 효율적 처리가 가능합니다.
자, 이제 단어의 개념적인 측면을 간단히 훑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실제 단어를 두고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개별 사례를 보다 보면 여기서 논의한 내용을 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어의 개념이나 추상적-실현적 형태의 구분을 어렴풋이나마 가지고 있으면 단어의 세계를 여행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 장에서 다룬 단어 개념에 대한 논의가 불충분하다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단어의 다른 개념을 충분히 소개하거나 한국어 조사와 같이 애매한 케이스를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런 복잡한 이슈는 뒷 장에서 여러 사례를 설명한 뒤 마지막에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시점이 되면 더 복잡한 주제도 거뜬히 이해할 배경이 더 쌓여 있을태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