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세계
세상엔 수많은 언어가 있고 각 언어에는 수많은 단어가 있습니다. 두꺼운 단어책을 통해 외국어를 배울 때 특히 실감할 수 있는 사실이죠. 아무리 두껍고 어려운 단어책이라고 하더라도 그 책을 벗어나는 단어는 얼마든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단어 공부는 지루하고 끝없는 영역인 것처럼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겉보기에 자기 멋대로인 단어의 세계에도 나름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인식하면 단어의 세계를 여행하는 부담을 어느정도 덜 수 있지 않을까요?
단어에는 분명 우연적이고 자기 멋대로인 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단어의 소리와 뜻이 지금 존재하는 방식으로 짝지어질 본질적인 이유가 없습니다. 예를들어 /사과/라는 소리가 영어의 'apple'과 같은 과일을 가리켜야 할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과가 프랑스어로 'pomme', 스페인어로 'manzana'일 수 없습니다. 프랑스인들과 스페인인들만 특별히 논리적이지 않을 이유도 없는데 말이죠. 따라서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 단어를 '무작정 외우는' 단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더 큰 시야에서는 체계적인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중 특히나 유용한 것이 바로 '기능어(function word)'와 '내용어(content word, lexical word)'의 구별입니다. 관찰된 거의 모든 언어에서 단어는 크게 기능어와 내용어로 나누어집니다. 내용어란 말 그대로 어휘적 내용을 가진 단어로서 실질적인 뜻을 가진 말 단위입니다. 의미가 실질적이라는 말을 간단히 이해하면 실제 세계나 마음 속에 해당하는 단어와 짝지어질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가령 앞서 예시로 든 '사과'는 현실에 대응물이 있고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내용어입니다. 내용어는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실질적 의미를 담당합니다.
반면 기능어란 문법적 기능을 담당하며 문장을 적절하게 구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기능어는 내용어와 반대로 본질적으로 기능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 의미가 실질적이지 않습니다. 앞에서 의미가 실질적이라는 것은 세계나 마음 속에서 해당 단어에 해당하는 대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황이나 속성을 말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기능어의 의미는 비실질적이며 기능적입니다. 따라서 기능어에 해당하는 대상을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기능어의 대표적인 예시로 영어의 정관사 'the', 한국어의 서술격 조사 '-이다'를 들 수 있습니다. 뒤에서 더 많은 예시와 함깨 내용을 더 설명할태니 여기서는 우선 기능어가 무엇인지에만 집중해도 괜찮습니다. 'the'는 영어에서 자신과 결합하는 명사구가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가령 'The cat'은 해당 맥락에서 명확히 알고 있는 '그 고양이'를 말 합니다. 반면 부정관사 'a'가 붙은 'a cat'은 '한 마리의 고양이'를 나타내며 해당 발화 맥락에서 그 고양이의 정체가 명확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 예시에서 'the'는 분명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the cat'은 'a cat'과 분명히 다른 의미를 구성하니까요. 하지만 'the'에 해당하는 대상을 '사과'처럼 명확히 떠올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the'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논의는 사실 매우 복잡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the'가 '사과'처럼 실질적 의미가 아닌 기능적 의미를 가졌음을 알아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한국어 '-이다'는 어떨까요? '사과는 과일이다' 라는 예문에는 '-이다'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이 문장은 말 그대로 사과가 과일의 한 종류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사과는 과일일까?'는 어떤가요? 이 문장은 화자가 사과가 과일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고 청자에게 그 사실 여부를 묻는 의미입니다. 즉, 두 문장 사이에서 '-이다'와 '-일까'의 차이를 통해 의미 차이가 발생함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다'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의 'the'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를 문법 바깥에서, 즉 실제 세계나 마음 속에서 찾기란 대단히 곤란합니다. 따라서 '-이다' 또한 기능적, 문법적인 단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다'를 서술격 조사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교문법적 방식으로 엄밀한 정의가 아닙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다'는 '-이/가'처럼 명사와 결합하지 않으며 동사나 형용사처럼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막연한 단어의 세계를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용적, 실질적 의미를 가진 내용어, 또 다른 하나는 문법적, 기능적 의미를 가진 기능어입니다. 이렇게 명확한 구별을 만들고 나면 언어에는 오로지 언어의 체계적 작동을 위해 존재하는 요소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운 부분이죠. 단어의 체계성에 대한 이런 인식은 단어는 물론 문장성분, 품사, 문장 형식 및 기능에까지 이르러 언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아리송한 문법적 단어를 학습하는 두려움을 조금 덜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