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어떻게 보일지는 조금 예상되지만 이 글은 정치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핫한 양자역학을 다루는 글도 아니다.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말해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회의론에 가깝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지 같은 거창한 주제부터 공중에서 떨어뜨린 공 하나가 매번 정확히 어떤 경로로 떨어지는지 처럼 물리적인 문제까지 완전히 예측하고 이해할 수 없다. 많은 경우를 축적해 경향성과 큰 수의 법칙에 기댈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근대 과학에서 무언가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표준적 방식은 대상을 기계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솜씨 좋은 장인이 충분한 자원을 동원하면 대상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다는 식의 접근법이다.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못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기계론적으로 모든 매커니즘을 이해하기에는 세계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반대로 사람의 지적 능력이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가령, 데카르트는 신체와 정신을 모두 기계론적으로, 나아가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신체를 이루는 각각의 부분은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원리로 설명되지만, 이 부분들이 단순히 모인다고 해서 정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데카르트는 신체와 정신이라는 두 가지 실체를 전제하게 된다.
그중 신체는 물리적 실체이므로 ‘어떻게든’ 설명 가능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은 어떤가? 의식과 정신의 매커니즘에 대해 어떤 이론이 제시되든 전적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설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데카르트가 도달한 유일한 확실성은 바로 “생각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위대한 깨달음이다.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근거를 찾아낸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존재’를 확신했을 뿐, 그 생각하는 주체의 작동 메커니즘까지 밝혀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은 어느 시점 이후, 세계를 마치 기계의 설계도처럼 총체적으로 이해하겠다는 태도를 유보하게 된다. 세상이 실제로 기계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그것을 기계적으로 낱낱이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촘스키에 따르면 뉴턴이 구축한 물리학적 체계가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을 반박하면서도 “유령은 그대로 두고, 기계를 퇴마했다”고 설명한다. (Newton exorcised the machine; he left the ghost intact. — On Nature and Language, 2002, p. 53) 즉, 데카르트식 영혼(ghost)은 그대로 남겨둔 채, 신체에 해당하는 기계적 세계에 대한 설명조차 더 이상 순수한 기계론으로는 이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단지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물리적 실체인 신체조차 기계처럼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전부 포기하야 할까? 체계적 설명과 이해를 버리고 직감과 이야기로만 세상을 해석해야 할까?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기계론적 관점에서 완전한 이해에서 다소 후퇴했지만 과학과 학문은 다른 면에서 매우 발전했고 우리의 이해 범위는 넓어졌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알고자 하는 대상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쩌면 관측되는 데이터 일부를 무시할 수도 있다.
가령 앞서 언급한 사례로, 공을 떨어뜨리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때 공이라는 물체의 추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개별 공의 재질, 그 날의 습도나 기압, 공을 놓는 사람의 자세나 공을 다루는 방식, 땅의 정화한 높낮이 등을 다소 무시하고 '모형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역으로 여러 사례에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이론을 구축할 수 있다.
생성문법도 비슷한 시도의 일환이다. 생성문법은 모든 언어 자료를 취급하지 않으며 반대로 많은 언어 자료를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언어 현상에 지나치게 많은 변수가 개입될 수 있어 핵심적인 문법적 직관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를 통해 생성문법은 언어라는 복잡다단한 현상에서 일관적인 모형을 도출하려고 한다.
이런 시도와 반대로 최근 흐름처럼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컴퓨팅 파워를 통해 분석하는 양적 방법이 가능할수도 있겠다. AI를 통해 엄청난 천문 데이터를 비교분석하고, 언어 뭉치인 코퍼스를 통해 언어를 분석하는 등의 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만 이때도 이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그대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앞서 질적 맥락에서 전개된 문제도 결국 인식 문제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이런 한계 앞에서 우리는 다소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태도와 진리에 대한 유보적인 태도를 가지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 포기하기엔 실제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음도 사실이고, 확신하고 밀어붙이기엔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타협적 태도는 현실적으로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아주 약간은 경감시켜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어떻다' 혹은 '어떠해야 한다'는 판단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함께 과학과 인식 자체에 대한 탐구도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