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앉으려다 뒤로 물러섰다. 갈색으로 반짝거리는 날개를 펴고, 검지 손톱보다 좀 더 큰 녀석이 날아올랐다. 하얀 커튼에 앉은 모양을 보니 분명 바퀴벌레다. 기다랗고 가늘게 머리 위로 솟은 더듬이가 보인다. 가슴을 졸이며 두 손을 올려 커튼 주름결을 따라 접히도록 있는 힘껏 눌렀다. 녀석은 내 손보다 빨랐다. 재빨리 커튼 사이를 나오더니 창틀 맨 위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화장지를 말아서 손을 최대한 빨리 움직였지만 녀석을 놓치고 말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책상 위와 바닥의 물건들 사이를 치워보아도 잠잠하다. 침대 밑과 구석들을 둘러보아도 소용없다. 어딘가에 숨어버린 바퀴녀석은 숨을 죽이고 있나 보다. 불을 켜 둔 채 방문 밖으로 나와 문을 꼭 닫았다.
먼저 마음을 잠시 진정시킨 후 잠시 기다렸다. 오늘 녀석을 찾아내지 않으면 우리 집을 바퀴벌레에게 내어줄 수도 있는 일이다. 결혼 후, 두 번째로 이사 갔던 오래된 아파트가 기억났다. 밤이 되면 부엌을 돌아다니는 바퀴벌레에 놀랬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 이후로 오래된 집을 기피했고, 바퀴벌레가 없는지 철저히 살피게 되었다. 새집인 이곳에 녀석이 어떻게 침투할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텃밭 농사를 지으며 오늘 집으로 들고 온 도구 상자 때문 아닐까 싶다. 텃밭을 일구면서 쓰이는 가위와 노끈 그리고 진딧물용 분무기 등이 들어있는 도구박스에 함께 타고 들어온 것이리라. 농사를 지으면서 얻는 즐거움도 있지만 불편함도 추가한다.
잠시 후,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침대 가까운 바닥에 작고 기다란 모양의 바퀴벌레가 동작을 멈추고 있다. 방문을 최대한 소리 없이 닫아 두고서 손에 잡을 도구를 찾았다. 얼른 눈에 보이는 것은, 머리카락을 치우려 다이소에서 구입한 긴 손잡이가 달린 돌돌이 스티커다. 조심히 바퀴벌레 근처에 기구를 놓아두니 가까이 다가온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렸다. 녀석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두 손으로 손잡이를 꼭 쥐었다. 가장 가까이 마주한 순간, 온 힘을 다해 기구를 재빨리 밀었다. 명중이다. 녀석의 사체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성공이다. 우리 집을 바퀴벌레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이를 꽉 깨물고서 물휴지를 서너 장 겹쳐 사체를 치웠다. 그리고 바퀴가 지나갔을 바닥을 힘주어 깨끗이 닦아냈다.
벌레가 무서워 소리 지르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거침없이 바퀴벌레 사체를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휴~! 별일도 아닌데 나 자신이 좀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두렵고 떨리는 일을 대처할 때 좀 더 침착하고 용감해진 나를 발견한다. 큰 어려움들이 닥쳤을 때 숨거나 포기하지 않고 애쓰려 한다. 용감하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사람들과의 관계나 일상에서도 계속 늘어만 간다.
자녀들의 실패와 시댁의 어려움에도 조금씩 대담하게 받아들이고 잘 감당해 낸다. 예의와 상식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도 두려워하거나 휘둘리지 않는다. 주변에 힘들게 하는 이웃이나 친구들을 대했을 때 준비 없이 부딪치거나 피하지 않는다. 그냥 힘든 사람들에게는 서로 상처되지 않게 거리를 두거나 논리적인 말들을 미리 답으로 준비해 둔다. 내가 두려워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상대를 직접 마주하고, 어려운 일도 부딪쳐서 극복하려 힘써야만 가능한 일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예상치 못한 일을 해결해 나가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내가 좋다. 놀람도 줄고 두려움도 줄었다. 가끔은 마주치는 인생 파도를 그냥 부딪치며 서 있는 내 자신이 괜찮아 보인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좋은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