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주말 아침이다. 72개짜리 화려한 파스텔 상자를 펼쳐서 14개 색깔을 골랐다. 골드 예로우, 라이트 퍼플 바이올렛, 로즈 핑크, 베로나 그린, 이름도 예쁜 스칼릿... 봄날 꽃밭을 그려볼 참이다. 둥근 원을 넓게 기준선으로 그리고서 여러 종류의 봄꽃들을 채워본다. 다닥다닥 붙은 히아신스, 귀여운 스위트피, 옆을 보고 있는 수선화, 작고 둥근 아네모네, 별 모양의 아마릴리스 그리고 오므라진 튤립도 두 송이... 공간을 잘 배분하지 못해 튤립의 자리가 부족하다. 자리를 조금씩 비켜가며 테두리를 잘 지킨 꽃그림은 조화롭게 둥근 꽃밭으로 완성되었다. 커피 한 잔에 재즈 음악을 들으며 그린 그림은 20분 훌쩍 넘겨서야 완성되었다.
2주 전부터 매일 아침 그리기 시작한 꽃그림은 벌써 11일 차가 되었다. 책을 보며 스스로 따라 그리기를 하는 꽃그림 모임은 하나같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색을 블렌딩 하여 멋스러운 꽃그림을 완성하고서 인증 사진을 올린다. 집에 있던 42색 오일 파스텔과 남은 종이들을 사용해 볼 요량이었다. 막상 그림을 시작하고 보니 준비물은 소프트 오일 파스텔로 질감이 훨씬 부드러운 재료였다. 모임 3일 차가 되던 날 인터넷을 켜고 72색 목판 케이스에 담긴 제일 좋은 소프트 오일 파스텔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스케치북도 A4와 A5로 제대로 준비했다. 내 이름으로 배달된 미술 용품들을 바구니에 담아 책장에 올려 두고서 아침마다 책상 위에 펼쳐 놓는다. 아이들이 사용하다 넘겨준 재료들이 아니라 새 책과 새 준비물에 내 이름을 새겨 본다.
20여 년간 불리던 나의 이름은 예@엄마, 쌍둥이 엄마, 셋 맘이었다. 그림을 그리면서는 그림 위에 나의 이름을 새기고, 번역 공부를 하면서는 실명으로 정보를 주고받는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니 남편은 나의 이름을 종종 불러준다. 쑥스러워도 듣기에 좋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는 또 멋진 필명을 꿈꿔본다. 나를 찾아가는 시간들이 너무 늦은 듯 어색하기도 하지만 사실 신이 난다. 어쩌면 좀 더 빨리 시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4월 초 남편과 제주로 둘만의 여행을 떠났다. 자취한다는 마음으로 3일을 지내라며 아들의 식사는 아무것도 준비해 놓지 않았다. 캐리어에는 화장품, 원피스, 카디건, 구두 그리고 액세서리로 내 물건들을 절반 넘게 채웠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내 것들을 모두 줄여서 최소한으로 사용했던 공간이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체험할 여행 소가 아닌 중년의 우리들이 걷고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을 선택했다. 송악산 둘레 길을 트레킹하고 세미 오름에 올랐다. 지역 음식인 고등어 죽을 먹고 이른 새벽에 일출도 구경했다.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제주의 들꽃들을 사진 찍고, 푸른 바다에 멈춰서는 선글라스를 낀 나의 모습도 남겨보았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담느라 발걸음이 늦어도 이제는 느긋이 기다려주는 24년 차 동반자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다.
오늘도 서로 돕기 위해 주고받는 피어 리뷰가 세세히 달렸다. 숙제로 제출한 번역 문서에 어휘가 어울리지 않고 오역이 있다는 동기들의 조언을 얻었다. “오~! 너무나 고맙습니다.” 댓글을 달았다. 처음에는 지적받는 일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존심이 상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실력 있고 예리한 동기들의 도움을 입어 번역본을 수정해 본다. 올해 1월 초에 시작한 출판 번역 공부는 몇 차례 고비를 겪었다. 영어 번역 공부를 제대로 하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서 버텨내며 부족한 실력을 가감 없이 내비쳐야 했다. 편히 지내도 될 나이에 사서 고생한다는 남편의 걱정 어린 조언이 더해졌지만 다시 또 6주 과정을 신청했다. 통역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는 2년을 보냈다는 번역가 리더의 말에 그만둘까 하는 고민을 덮게 되었다. 2년간은 도제 기간이라 여기며 공부해 보자고 말이다. 몇 달 전 열심히 공부해 보자고 내게 선물한 빨간 전자 딕펜을 만지작거려 본다. 두 번째 인생은 외국어와 글을 다루고 싶다는 소망을 다시 껴안는다.
아지랑이 보이는 봄날 책상에 앉아 영어 문장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나를 다독이며 조심스레 달래 본다. 나 스스로에게 선물한 도전과 꿈들을 버리지 말자고... 다른 이의 그림, 다른 이의 멋진 번역본 말고 나의 그림과 나의 글을 펼치며 오늘도 천천히 걸어가 본다. 누군가는 핑크, 누군가는 마젠타, 또 누군가는 올리브색으로 그림을 그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