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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가다 Sep 13. 2023

보문 한 바퀴, 인생 한 바퀴

경주 산책길 1

경주로 이사 온 이후, 몇 가지 좋은 선물을 받았다. (도시에서 시골로의 삶을 자꾸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중 하나는 멋진 산책길이다. 보문호수 둘레를 부분적으로 걸어봤지만, 한 바퀴를 다 걸어보는 일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두 달째, 주말이 되면 비가 와도 이 산책이 기다려진다. 누려야만 내 것이 되는 선물....



 

퇴근한 남편과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보문호수로 향한다.

출발은 호수 변에 위치한 대형 전시관, HICO 건너편 스타벅스에서 시작한다. 주변에 무료 주차도 가능하다. 출발할 수 있는 여러 곳이 있지만 가장 맘에 드는 시작과 끝이다. 반반이라고나 할까? 조용한 시골 공원 절반과 사람 구경도 가능한 멋진 산책길 절반이다.

 

우리의 코스는...

스타벅스- 돌다리- 전망대- 달 포토존- 엘로우 카페- 물너울교- 물너울 공원- 콜로세움- 수상 공연장- 라한 셀렉트 호텔(호반길)- 아덴 카페- 힐튼 호텔- 그리고 드디어 다시 스타벅스!

 

저녁 시간이 되면, 벚나무 아래 조명이 켜진다. 위로 향해 비추는 불빛이 동화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경주는 조명을 잘 사용한 관광지가 많다. 그중, 동궁과 월지는 야경이 멋져 밤중 관광지로 더 유명하다. 내가 보기에는 보문호수도 그렇다.

 

작은 하천에 길게 이어진 돌다리를 지나고, 좁은 숲길을 제법 걸으면 넓은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은행나무 길에 이른다. 보문호수는 벚나무가 대부분이지만, 중간중간 여러 종의 수목도 구경할 수 있다.

 

한여름에는 귀가 먹먹해지도록 울어대는 찌르레기와 매미 소리로 머리가 오싹해진다. 숲길을 걷는 일은 특별한 이유 없어도 편안하고 즐겁다. 호수 주변을 걷다 보면 곳곳에 숨겨져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보통은 클래식 음악이 흐르지만 때로는 가곡과 재즈도 들린다. 물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 소리에 작은 근심을 들고 와도 소멸될 수 있으리라.  고민이 많은 날이면 이 호수 변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면 눈덩이처럼 컸던 고민은 차곡차곡 정리가 되기도 했다. 귓가에 들리는 음악이 한몫했다. 

 

걷다 보면 잔잔한 호수 위로 유영하는 오리들을 보는 날이 있다. 여러 마리 오리가 넓은 빙판 위를 미끄러지며 각자 자신만의 방향과 영역으로 헤엄쳐 가는 모습이 신기하다. 정말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넓은 수면 위가 부럽고, 밤 중 혼자 누리는 자유가 멋져 보인다. 복잡한 삶에서 나와 드넓은 호수 변을 걷는 내 모습도 자유롭게 공간을 누리는 한 마리 오리 같다.

 

두 눈은 잠시 멈춰 호수 위 오리도 보고, 저 멀리 멋진 강 건너 풍경도 누리지만, 두 손과 발은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앞뒤로 움직인다. 처음 시도했던 보문 호수 한 바퀴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멋진 풍광에 멈춰 사진을 찍느라, 쉬다 가기를 반복했다. 때로는 넓은 호수를 감당 못 할 목표라 생각하니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때로는 중간중간 잘 설치된 의자에 쉬어가기도 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 본 경험이 감사하다. 한 번을 어렵게 끝내고 나니 두 번은 좀 더 쉬워졌다. 

 

몇 차례 보문호수를 완주하며 걷다 보니, 한 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코스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 한 시간 반 운동을 몸에 익힌 것, 기쁜 마음으로 즐기는 것. 이런 것들이 완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과연 끝까지 잘 마무리하고 웃을 수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앞으로도 몇 차례 이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 타 지역으로 흩어져 성장하고 있는 자녀들의 일도 아직은 안심하지 못한다. 장년의 시간과 노년의 시간도 장담할 수 없다. 막막하고 멀기만 한 인생에 대해서는 생각할 때마다 염려만 스멀스멀 올라온다. 먼저 간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부분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선을 오늘, 한 달, 한 해로 돌려 완성을 생각한다. 오늘 24시간을 한 바퀴 잘 돌고, 9월 한 바퀴를 잘 돌아야겠다. 어제를 완주했고, 8월을 즐겁게 완주했던 것처럼 2023년을 잘 돌아서 마무리하려 한다.

 

손과 발은 바쁘게 움직여도 가끔 시선은 하늘도 보고, 저 멀리 나의 60세 70세도 즐겁게 상상하면서 그렇게 걸으려 한다. 언젠가는 80 또는 100세의 코스를 멋지게 완주하고 집으로 돌아갈 날이 올 것 같다.

 



다음 주 주말이 또 기다려진다. 두 달간 발견하지 못한 멋진 곳들을 또 발견할 수 있겠지. 1시간 20분으로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멈추지 않고, 끝까지 웃으면서 멋진 모습으로 걸을 수 도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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