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왜 도로시 역할을 거절했을까? 오즈의 마법사를 다시 공연한다면 나는 주인공에 도전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우연히 모집공고를 본 나는 영어 뮤지컬 기획자 자격증 취득 과정에 도전했었다. 3개월간 매일같이 영어노래와 춤, 기획에 관련된 전문 강사들의 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오즈의 마법사’ 뮤지컬 대본을 가지고 20여 명의 수강생들이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얻고 공연을 준비했다.
전문가들이 아니었기에 오디션은 치열하지 않았지만 주인공 도로시 역에 추천을 받은 나는 경쟁을 앞두고 미리 포기를 선언했다. 아이들만 키우며 집에 있던 세월은 자신감을 몽땅 쓸어 없애버린 듯했다. 시간을 들여 영어 대사를 외워야 하고 춤과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도로시 역을 맡은 아담한 체형에 긴 머리카락의 젊은 동기는 노래와 춤에 능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역할을 맡고 싶어 했다. 그녀는 공연 준비 기간 동안 온 힘을 다해 준비했고 동기들의 질투까지 잠식시키며 겸손히 행동했다.
두 차례의 공연 기간 동안 파란 원피스와 갈래 머리의 도로시의 모습을 한 그녀는 무대를 잘 사용하며 큰 박수를 얻었다. 물론 그녀를 뺀 나머지 우리들도 사자와 허수아비, 마법사와 마녀 그리고 요정 등 뮤지컬 속에서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최선을 다했다. 무대 위에서 다 함께 손을 펼치며 마무리한 동작이 찍힌 사진을 보면서 문득 생각한다. 모두가 제자리에 있었기에 이 뮤지컬의 제목이 ‘오즈의 마법사’ 임을 떠올릴 수 있다고...
주목받고 주인공 되기를 좋아하던 나였다. 어릴 적 임원선거에는 언제든지 앞장서서 출마했었고 학교와 교회에서 연극을 할 때면 대본을 쓰고 배역들을 나눠주며 지도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해보자고 주도적으로 앞장서던 젊은이였다. 그러던 내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잘 한 남편 덕분에 그이의 옆과 뒤에 서는 것에 익숙해졌다.
집안의 거친 일은 무엇이든 그가 미리 해주었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은 손을 대지 않아도 되었다. 무엇에든 꼼꼼한 남편 덕분에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싸움을 걸어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잘 참는 그이 덕분에 큰 소리를 내서 따지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저 양보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거나 앞장서지 않는 얌전한 관객이 되어있었다.
남편이 해외로 발령받아 떠난 일주일 후... 이렇게 공주처럼 살고 있다가는 큰일이 나겠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부엌의 LED 전등이 고장 나 당황하고, 자동차를 관리하면서 암담한 일들도 많았다. 아프신 시부모님을 방문하고 돌보면서도 강한 마음을 먹어야 했다. 남편이 원격으로 전화와 화면을 통해 적극적으로 돕기는 했지만 나 스스로 모든 상황을 운영하게 되었다.
사람이란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후로부터 나는 어릴 적 모습처럼 씩씩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부모님을 돕기 위해 용감하게 장거리 운전도 하게 되었다. 집안에 파손된 물건들이 생기면 연장통을 꺼내 들었다. 주도적으로 내 삶을 계획하고 의견들을 남편에게 제시했다. 가끔 남편은 씩씩하고 용감해진 아내의 모습을 섭섭해하는 것 같지만 나는 너무나 독립적으로 생활들을 즐기고 있다.
거실 한가운데 나만의 책상을 두고서 글을 쓰는 일은 즐겁다. 내 소유의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갖게 된 것조차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새벽과 늦은 밤 나를 위해 시간들을 누릴 수 있는 상황들이 신기하다. 가끔은 나를 위해 맛난 점심을 준비하고 내가 결정한 일들에 대해 온 힘으로 추진한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서가 아닌 내 이름에 맞는 일들을 하며 누리는 기쁨은 바로 그런 외침 아닐까?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가족들 안에서 이제는 누구 하나 슬픈 희생을 하지 않고 각각의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 모두들 또 다른 자신의 역할과 꿈을 찾고 누리면서 말이다. 남편에게도 아빠의 무거운 자리가 아니라 그가 주인공인 삶을 살게 해 주련다. 그의 삶에는 그가 주인공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