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에 함께 오르던 가을 남자, 그가 그립다.

가을연가

by Jina가다


토요일 오후, 그와 똑 닮은 아들들은 파란 유니폼을 입고서 축구화를 챙긴다. 40여분을 이동해야 하는 축구장까지 운전을 부탁하는데 나는 그저 좋다. 자동차 키를 건네는 것보다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그들을 탐색하는 일도 재미있다.


뜨거운 여름날에도 까맣게 그을리도록 공을 차던 아들들은 축구하기 딱 좋은 선선한 가을이 좋단다. 넓은 축구장에 동호회 아저씨들과 조우하는 20대 아들들에게 손을 흔들며 차 머리를 근처 바다로 향한다.



통유리창을 어깨 옆으로 하고 뜨거운 커피 한잔을 들었다. 쿠바 도시의 이름을 딴 카페 하바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에 감성 가득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 앉아 있자니 가을밤에 어울리는 깊은 고독이 차오른다. 창밖으로 흰 파도는 거친 바위에 부서진다. 원목의자와 꽃무늬 의자 커버는 촌스러운 것 같지만 그렇게 또 어울린다.



하늘, 바다 그리고 나를 볼 수 있는 곳 '하바나'에서 잠시 나를 들여다본다.


한참 동안 어두워지는 바다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먼 곳에 있던 그도 똑같은 마음이었을까? 핸드폰이 울린다. 스카이프를 켜고 얼굴을 마주했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화면으로 만나보는 남편은 반팔 차림의 더운 여름이다. 휴가를 마치고 한 달 전 해외 일터로 다시 떠난 그가 있는 나라는 일 년 내내 무더운 날씨다. 가을 초입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던 그는 한국의 아침과 저녁을 감탄하며 시원한 가을 날씨가 반갑다고 중얼거리곤 했었다.


그와는 종종 스카이프를 작동시켜 마주한 채 식사를 하고, 독서를 한다. 영상을 켜 놓은 채 서로의 할 일을 진행하기도 한다. 나는 빨래를 접고 설거지를 하고 그는 업무를 확인한다. 쉬는 날이면 우리는 이렇게 한국에서 함께 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을 공유하며 지낸다. 외출했던 아이들이 돌아올 때면 가끔씩 화면에 떠있는 아빠의 모습에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일들도 자연스럽다. 코로나로 인한 인터넷 도구 사용이 익숙해져서 줌과 스카이프, 카톡 등 여러 가지 통로로 가족들과 접속 수 있어 다행이다.


매년 여러 차례 함께 등산을 했던 그는 한국의 가을 산을 그리워한다. 어릴 적 한 시간씩 걸어서 등교했다던 그는 어른이 되어도 시골길과 산길을 좋아한다. 운동을 딱히 좋아하는 그는 아니지만 산을 탈 때만큼은 어느 누구도 그의 속도를 좇아갈 수 없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가을과 어울리는 그는 가을산을 유독 좋아한다. 대한민국의 많은 산 중에 함께 오른 산이 제법 많아진 재작년에는 지도에 빨간펜을 들고 세어보며 평생 함께 산을 오르자고 약속했었다.



대학 4학년, 동아리에서 함께 단풍구경을 갔던 그는 내장산 공중전화 부스에서 집에 전화하는 나를 보며 예뻤다고 말했다. 친정이 있는 도시를 감싼 무등산에는 가족들과 여러 차례 산을 누렸다. 시댁의 명산인 일림산에는 5월마다 철쭉으로 붉은 카펫을 깐 정상을 보러 아이들과 올랐었다. 가을 단풍이 유명한 오대산에서는 흐르는 계곡을 따라가며 그렇게 새빨간 단풍을 처음으로 보았다.



경주에 사는 1년 동안은 산으로 둘러싸인 경주의 명산들에 도전했다.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 갈대로 가득한 무장산과 왕들이 가마를 타고 다녔다는 왕의 길을 오르고 걸었다. 딸아이와 도전했던 제주 한라산서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풍광들을 감탄하며 눈에 가득 담았다. 오르고 내리는 동안 가족 간에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멋진 추억의 장소다.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는 울주의 신불산은 정상에 서서 핸드폰을 들고 어느 곳을 찍어도 작품이 되는 멋진 산이었다.

부산에 이사 온 후 자주 올랐던 곳은 해운대 중심에 위치한 장산이다. 등산길이 잘 조성된 장산은 갈대밭 덕분에 가을날 유난히 예쁘다.



작년 가을 그와 함께 올랐던 기장의 삼각산도 기억난다. 출발시간이 늦어 급히 산을 올랐다가 중간에 길을 잃어서 한참 동안을 헤맸다. 무조건 길은 길로 통한다며 언제나처럼 거침없이 앞으로 가던 그는 결국 길을 찾아냈다. 뒤따르는 나는 가끔씩 가슴을 졸였지만 되묻지 않고 모르는 척 걷기만 했다. 산에서는 그저 앞장서는 이를 따르는 게 안전한 등산길이 됨을 알고 있었다. 산에서는 해가 금세 진다는 것을 그날에야 이해했다. 주차장에 가기까지는 아직도 한참인데 이미 어둑해져서 핸드폰의 플래시를 비춰야만 했다.




아뿔싸... 내리막길에 넘어졌던 나는 점퍼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그제야 알았다. 중간중간 사진을 찍기도 하고 폰을 체크했던 기억을 더듬어보니 분명 마지막으로 의심되는 지점은 시냇물이 흐르던 내리막길이다. 그는 나를 차에 데려다주고 다시 산을 올랐다. 내일 다시 찾으러 오자는 내 부탁에도 그저 문을 잘 잠그고 기다리라며 핸드폰의 불빛을 의지해 길을 떠났다. 30여분이 흘렀을까? 두 손을 흔들며 신나게 뛰어오는 그를 발견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서 잃어버린 폰의 전화벨을 울리며 갔다는 것이다. 핸드폰을 되찾은 기쁨도 컸지만 믿음직한 그를 재발견한 기쁨이 더욱 컸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를 믿는다. 캄캄한 어둠에서도 해답을 찾아오는 그를 여러 차례 경험했기에 가끔은 조급함이 엄습해도 잘 기다릴 수 있다. 내가 믿고 기다릴 수 있는 것 그도 알고 있다. 살아온 날들이 많다는 것은 그런 것일까? 더 많은 신뢰와 더 깊은 우정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십 년이 더 지난 후에는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하하



올 가을에는 멋진 단풍구경을 함께 할 수 없어 그저 아쉽기만 하다. 그가 돌아오는 12월에는 눈이 내리는 겨울산에 오를 참이다.


우중 경주 왕의 길...


안개 낀 제주 백록담...


울주 신불산 간월재...


부산 기장 달음산


부산 해운대 장산


등산 후 즐기는 부산의 음식들...(바닷가 가정식, 솥단지 전복죽, 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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