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가지 않았다면 꼴등을 면했을까?
한국엄마는 철이 없어도 너무 없다-두번째 미친년 소리를 듣다.
지금도 후회하는 것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아이와 관련해서는 후회하는 것이 있다. 부지런히 아이들을 낳아서 3명은 낳아야 하는데 2명을 낳은게 후회된다. 대한민국 출산율을 보았을 때 한 가정에 3명은 낳아야 모든 사람들의 노후가 보장이 되며 살기좋은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다.
이 생각은 일본에서 작은녀석을 출산하면서 생각한 것이다. 큰 아이 임신 후 심한 입덧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출산 하루 전날까지 직장을 다녔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출산했다. 한국의 출산에 대한 경험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일본에서 둘째 돌콩을 출산한 경험은 거의 신비롭고 황홀했다. 아이가 태어나는 날 아픔보다 행복했다. 그 당시 출산 했을 당시 나이도 많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바로 일을 시작 할 생각을 늘 머릿 속에 그리며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둘 만 낳기로 했다. 난 이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다. 큰 아이는 모유수유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한달 만에 다시 복귀했다. 그 당시는 결혼하고 출산하면 직장을 그만 두라는 간접 압박은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작은 아이만큼은 마음껏 모유수유를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젖이 잘 나오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보건소에서 나온 조산원의 도움으로 모유수유를 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이에게 엄마의 젖이 받지 않는 것이다.
엄마의 젖이 아이에게는 독이었다. 난 다시 미친년 소리를 들었다.
임신에서 출산시까지 내 몸무게는 60kg도 나가지 않았다. 키 164kg에 날씬해도 참 날씬한 편이었다. 큰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 자기 엄마 아기 가졌다. " 자리를 비켜달라" 고 일본 사람들은 몰랐다. 미안하다 할 정도로 임신한 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난 아이 출산 후 70kg이 넘는 거구가 되었다. 이유는 모유수유를 하고 싶은 마음에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작은 아이는 내 젖을 빨고 나면 울기 시작하고 조금 후 바로 설사를 하기 시작한다. 아이도 엄마도 서로 지쳐만 갔다. 아이는 잦은 설사로 엉덩이는 헐고 벌겋게 되며 젖을 빨지 않으려고 하고 나 역시 젖은 넘쳐 나고 힘은 들고 점점 살은 찌기만 하고 정말 힘들기 시작했다. 젖이 나오지 않는 약 처방을 받기 전에 약국(일본 약국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먼저 들렀다.
약국에서 의사의 처방 없이는 약을 팔 수 없으며 아이 출산 한 산부인과에 가서 상담을 해야 한단다. 그 당시 1994년도 한국과 일본은의 문화차이가 이렇게 크단 말인가. 내가 우리 아이 젖 안먹이겠다고 하는데 안 된단다. 법이란다. 할 수 없이 출산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아이의 대변한 기저귀와 엄마의 젖을 가지고 와야 한단다" 그래서 방금 아이가 대변한 기저귀와 내 젖을 짜서 젖병에 넣어 들고 갔다. 엄마 젖은 독젖이란다. 아이는 이 젖을 먹으면 먹을수록 잦은 설사를 하며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한다. 또 혼이 났다. 당신 미치지 않았냐 이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이런 젖을 물렸느냐고 호통을 쳤다. 난 정말 무식한 엄마이구나. 아이가 젖을 빨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일본은 확실한 선진국 이다. 산부인과 의사의 진단서(소견서) " 아이는 더 이상 젖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결과와 함께 보건소 조산원이 방문을 했다. 아이 출산 후 한달정도 방문을 해서 아이목욕, 아이양육에 대한 교육ㅇ을 했었다. 그 이후 6개월 이후 조산원이 방문해서 이유식교육, 젖 관리 마사지 등을 교육해 주었다. 젖 몸살 없이 순조롭게 젖도 멈추었다. 일본은 그 당시에도 모든 부분에서 체계적인 나라였다. 출산 당시 노산에 건강하지 못한 임산부는 병원비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건강한 산모는 병원비 감면이 없다.
한국에는 요즈음 조리원이있어 비용이 만만하지 않다고 들었다. 일본은 아이 출산 후 1주일동안 최고의 VIP대접을 받는다. 일본 여성들은 그 당시에는 아이를 낳고 싶어 했다. 병원은 호텔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어 출산 후에는 몸매 관리(다이어트)가 시작된다. 식단 메뉴는 양식, 일본식 원하는대로 선택을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머리도 감겨준다. 많은 산모 한 명 한 명 도와주는 도우미가 있다.
지금도 살짝 후회되는 건 일본에 살고 있었다면 한 명은 더 출산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조금 후회가 된다. 아무리 큰 아이가 꼴등을 해도 작은 아이가 보통아이라 해도 아이는 3명이 좋을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한 후 학교에 갈 일이 거의 없다. 아이들이 다 알아서 한다. 학교에 오라는 날은 참관일 밖에 없다. 일본에 5년 정도 살면서 겉보기에는 일본 사람 같아 보였다. 말이 씨가 된다고 큰 아이 어렸을 때 시댁에서 큰아이를 보고 일본놈 같다고 했다. 정말 일본 놈이었나. 그래서 일본 놈 보다 더 약삭빠르고 그 아이들보다 월등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일본 사람은 에스키모인에게도 냉장고를 파는 마케팅의 귀신이라고 한다. 이런 일본 교육을 7년 정도 받은 아이가 한국 교사, 어른들에게는 물건을 팔기는 고사하고 욕만 먹고 컸을까? 일본 아이들은 놀 때는 확실하게 놀고 해야 할 때는 정말 열심히 한다. 바보처럼 열심히 한다.
단합을 잘 한다. 그래서 왕따(이지매)를 시킬 때도 끝을 보는지도 모르겠다.
고 이승만대통령 말처럼 " 우리는 흩어지면 죽고 모이면 산다" 세계 속의 한국인 한국아이들은 흩어지면 최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