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사랑표현은 독특했다.
엄마의 사랑 표현은 독특하다.
엄마는 잠꼬대가 심했다. 엄마의 잠꼬대 소리는 비명을 지르거나 으윽 으윽 거리며 겁에 질린 소리를 낼 때는 도저히 무서워 깨우지 못할 때도 있었다. 외가는 4.19후퇴 때 남으로 넘어 왔다고 한다. 그 당시 소 달구지를 타고 기차도 타고 어렵게 어렵게 이북에서 피난을 왔으며 오는 도중에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 엄마는 10살정도였으며 어린나이에 힘들게 남한(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일가친척 하나 없고 북한 돈은 한국에서는 종이조각이라 사용할 수 없었다. 엄마는 장녀로 밑에 동생들이 많았다. 자기 가족을 끔찍히 위하는 편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도 외가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나는 식구들이 많은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외로움을 크게 타지 않는 편이다. 내가 아는 엄마는 친구 엄마들과는 좀 달랐다. 사는게 힘이 들어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이제는 엄마의 나이를 훨쩍 뛰어넘어 보니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우리엄마라도 미울 때가 있었다. 엄마가 화가 나면 입은 굳 다물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불까지 끈다. 그리고 주무신단다. 그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 나와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
엄마는 감정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특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아 보였다. 엄마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여 내 그림 숙제를 대신 했었다. 미술치료학 공부를 하며 엄마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모지스 할머니처럼 자기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마음을 추스리며 인생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몸으로 그림으로 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인생을 살아보려고 애를 썼던 것이었다.
보통 엄마는 아이 손에 있는 거 엄마 손에 쥐어 주거나 입에 넣어 주면 맛있다며 먹는다. 나도 우리 아이들이 손에 들고 있다 엄마 입에 넣어주면 맛 있는 척 하며 먹어 준다. 친정 엄마는 달랐다. 더럽다며 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낸것 같다. 이 때부터 엄마는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엄마의 그림은 수양버들가지가 땅을 쳐다보며 전부 축 축 쳐지게 그렸었다. 그리고 소녀는 빨래터에서 방망이로 빨래를 때리는 장면을 그렸었다. 늘 비슷한 형태의 그림을 그렸었다. 엄마의 그림은 미술치료로 보면 심리적.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었다. 마음에는 늘 화가 차 있고 자기가 책임져야 할 식구가 많은 것에 대한 부담만 생각하면 많이 힘들었나 보다.
내 기억으로 엄마에게 안겨 본 적도 없다. 엄마는 늘 힘들다며 안기려는 나를 밀쳐 버리거나 나와 마주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내 이야기를 들어 준 적도 없었다. 엄마는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일을 했고 계속 움직였다. 엄마는 한편으로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기관지가 좋지 않아 밤이 새도록 기침을 하며 쓰레기통에서 얼굴을 떼지 못하고 가래(담)가 목에 걸리면 없애기 위해 계속 기침을 하다가 기진맥진 쓰러져 있는 날도 많았다. 낮에만 생생하다. 원래는 병은 밤에 시작해서 아침 동 틀때까지 심하다. 잠결에 엄마의 기침 소리에 잠을 깨서 엄마에게 가면 엄마는 화를 냈었다. 손으로 가란다. 그래도 더 가까이 가면 엄마는 그 상황에서도 소리를 질러댔었다. " 이 눈치 없는 것아, 넌 내가 고통을 받고 있느데 빤히 쳐다 보냐, 빨리 들어가"라고 말했다. 괴로워 하는 엄마의 등이라도 톡톡 해드리고 싶은데 . . . . . .
엄마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 때는 그런 행동을 하는 엄마가 미웠다. 내 마음도 편안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생활을 하다가 대 수술을 받았다. 그 때 왜 그랬는지 지금은 엄마의 쌀쌀맞고 감정 기복이 심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난 심리 상담사다, 내담자(대상자) 중에는 우리 엄마처럼 자기 상처로 인해 감정 기복이 심하고 심리적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직도 과거에 묶여 있었다. 우리 엄마 역시 4.19 피난 오면서 겪어야 만 했든 그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후 장애(PTSD)의 상처가 아물지 못하고 덧나서 진물이 질질 흘렀다. 10살 정도의 계집아이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으니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 할머니가 엄마 밑으로 동생들을 여러명을 낳았단다. 피난 오는 길에도 죽고 피난 와서도 이런 저런 사고로 어린동생들을 비명횡사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해 외 조부는 눈이 실명 될 뻔 했고 외조부도 교통사고를 여러번 당했다고 한다. 그런 사건들이 늘 어린 계집 아이였던 엄마는 늘 머리가 아프다며 뇌신 인간 하는 편두통 약을 달고 살았다. 이렇게 머리 뇌리 속을 떠나지 않고 엄마를 괴롭혔다.
돌아 가실 때가지 늘 전쟁 속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총 소리가 들리고 비행기 소리가 나면 방공호로 숨고 그리고 도망 치고 했단다. 그래서 늘 잠을 자다가도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을 하기도 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밤마다 울부짖는 자신의 처절한 몰골을 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든 것이다.
딸에게는 잘생기고 멋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눈치가 없는 딸이 엄마가 쓰레기통에 얼굴을 박고 있는 걸 보고 말았으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엄마는 하나 밖에 없는 딸에 대한 사랑 표현이 독특하다. 너무 사랑해서다. 엄마의 처절한 모습으로 인해 나 역시 그 환경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 갈까 걱정이 되었든 것이다.
자기 딸은 자기처럼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엄마의 애증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위의 대문 그림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컬러링에 색칠을 했다(천국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