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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날이 온다-5

코로나로 인해 바뀐 내 인생-목발이라니

코로나 3년 세월에 많은 것들이 바뀐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공 하나 받는데도 어리버리 수준이다. 공이 무서워 피구 공 한번 맞을까봐 요래 저래 오징어 마냥 피해 다니다 아슬 아슬 한 찰나에 역시 완방의 피구공이 내 몸을 사정없이 때린다. 그럼 상대편 친구들이 이렇게 말을 한다. " 야 너 그럴줄 알았어 너무 비겁해 그래도 양심이 있으면 공 한번이라도 받다가 죽어라 그게 뭐냐." 주위에서 야유를 퍼붓는다.   난 정말 공이 날라 올 때 정말 무서웠다. 그래 "맞아 나 겁쟁이야"

그래도 잘 살아 남았잖아. 난 속으로 말을 해 본다.


물론 지금도 꼭 피구공이 아니더라도 한번씩 지금의 삶도 아슬 아슬한 곡예를 할 때가 있다. 

늙어막하게 코로나로 인해 남편의 취미가 180도로 변하면서 생긴 또 다른 취미생활이다. 바로 등산이다.


남편은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면 지금은 나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둘이서 딱히 할 만한 일이 없었다. 등산을 가자고 한다. 처음에는 근교의 산부터 시작을 했다. 등산에도 탄력이 붙으며 어느정도 체력도 길러 지면서 이제는 우리나라 명산을 둘러 보자고 한다. 막상 남편이랑 단 둘이서 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제법 산에 대한 맛도 느껴지고 산을 오르는 내 모습도 괜찮아 보였다.

산을 오를 때 남편이 먼저 나에게 부탁을 했다. 여러번의 큰 수술을 받은 남편은 그 휴유증으로 인해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안구건조증이 너무 심해서 눈을 거의 뜨지 못하는 상황이다. 혼자서 험한 산을 오르 내린다는 것은 자신도 위험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이런 사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속내도 한 몫 한 것 같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남편에게도 자존심이 있다.


가장 코로나가 심한 상황에서는 내가 다니는 교회도 유튜브로 예배를 드리므로 크게 방해 받지 않고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근교의 산을 갈 수 있고 토요일은 긴 시간을 국내산을 등산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사는데 너무 급급한 나머지 주변을 돌아 볼 시간이 없었다.  막상 시간이라는 여유 속에서 우리나라 국내산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느끼며 등산을 하는 그 묘미는 너무나 행복했다. 2년 정도 산을 잘 다니며 설악, 지리산, 높다는 국내산들도 잘 다녔다.  이런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거의 산을 다 내려와서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날따라 남편의 입에서 조심해라 헛발딛지 말고 조심해라 밑으로 보고 있는 돌은 밟지 말고 그 말에 갑자기 짜증이 올라온다.  "속으로 시그럽다고 나도 조심한다고" 왠 걸 난 그냥 미끄러운 돌을 보지않고 발을 내딛고 말았다.  정말 앗뿔사  화도 나지만 부끄럽기도 했다.  갑자기 발목이 꺾이는 느낌과 함께 나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가 나온다. 거짓말처럼 잘 내려왔는데 그 자리에서 내 발은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내 머릿속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조금만 더 내려가야하는데 참고 내려가보자. 일단 잠시 앉아 정신을 차려보기로 한다.  압박붕대라도 있으면 발목을 꽉 잡아 더 이상 충격이 없도록 압박을 해주면 되지만 그 동안 큰 무리 없이 잘 다녔다. 이대로는 더 이상 내려 갈수는 없는다.  손목에 면 손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래 이걸로 발목을 고정시키자" 내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그가 미안한지 한 마디 한다. "괜찮나 그래 조심하라고 했는데, 조심 안 했제"  이런 상황일수록 더 침착하게 행동을 해야한다. 마음 같아서 그냥 "너가 너무 조심하라는 잔소리에 짜증이 나도 모르게" "발을 헛딛었지" 손수건으로 발목을 최대한 꽉 잡고 나무토막 노끈 감듯 감았다. 갑자기 다리가 안 아프게 느껴지며 한발 한발 조심하며 산 밑까지 도착했다. 힘들게 산을 내려오고 나니 도저히 한 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마법에 걸린 듯 꼼짝도 할 수가 없고 발목이 아파오며 누구에게나 그 날이 온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털석 주저 앉아 버렸다. 일단 등산화부터 벗어야 할 것 같다. 발목은 평소 발목보다 퉁퉁부어 오르며 등산화는 내 발목을 앞박 하기 시작한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가야 하나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내 발의 통증은 이렇게 심할 수가 없다. 주차장까지 거리는 20분 정도 더 걸어가야 하고 이 상태로 가기에는 지금 상황으로는 갈 자신이 없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아니 눈치를 보기보다 상황에 대한 판단력이 매우 빠른 편이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차를 가지고 오겠다는 말과 동시에 벌써 실천에 옮기며 바로 쏜살같이 내려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참 대단하다.  우리에게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 날의 산행은 좀 힘든 편이었다. 악산이라고 돌도 많아 한 발 조심 조심해야 했고 주변은 곡예를 하는 것 위험한 곳도 많았다.  보통 유명한 산은 팻말이 있거나 무슨 무슨 산악회가 다녀갔다는 표시가 남겨져 있다. 그런데 나뭇가지에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다. 이미 이 산은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주는데 잠시 방심하다가 내 모습은 이 모양이 되고 말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사전에 미연에 방지하세요. 라고 조용히 알려 주었건만 조심하지 못해서 이런 사고를 내고 말았다.  

갑자기 망망하다 싶은데 자동차를 향해 열심히 뛰어 가고 있다.


이 상황에도 피식하고 웃어 본다. 그 상황에서 잠시 생각에 잠기며 참 사람은 대단하다. 

100여 년전 남미 멕시코와 하와이로 이주했던 한인들의 삶을 다룬 두 권의 책 김영하의 '검은 꽃'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  민족은 이동하고 문화는 섞이며 흘러가는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1905년 4월 4일 대한제국 시대 조선인 1033명이 인천 제물포항에서 멕시코로 향한다. 돈 벌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 떠났을 그들이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 이역만리 외국에서 고된 노동에 혹사 당하고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 살아 갔을 그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그 노동의 댓가로 받은 돈을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고 한다.  잠시 아픔도 잊고 그래 난 괜찮아, 내 옆에 자동차가 도착했다. 나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워준다. 그 다음은 물론 깁스를 하고 거의 3개월동안은 목발을 짚으며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도 이런 날은 온다. 꽉 채운 3개월을 보내고 다시 지금까지 등산을 다니고 있다. 

또 언제 사고가 날지는 모르지만 오늘도 조심을 한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른다.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 한다. 누구에게나 그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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