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아빠다. 잘 지냈냐?"
십 년 만에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혀가 꼬여 있었고, 발음이 샜다. 나는 생각했다. 술을 드셨구나. 그리고 남은 치아가 몇 개 없구나.
폰을 귀에 대고 벽시계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10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밤이 아니라 아침 10시.
그동안 몇 년에 한 번 걸려 오는 아버지의 전화를 피했다. 온갖 풍랑을 뚫고 비로소 안정된 가정을 이룬 나는 더 이상 그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어느 지방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를 나의 아버지에게 나의 어머니에 대한 욕설과 원망을 듣고 나면, 나는 두 분 모두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그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면 나는 늘 분노에 일그러진 얼굴이 되었고, 나는 내 존재의 가치도, 존재의 이유도 불분명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한없이 슬펐다.
그래서 나는 꽤 오랜 세월을 아버지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지 않는 '후레자식'으로 살아오면서 안정감과 죄의식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휴대폰 액정에 '아빠'라는 단어가 떴다. 그 순간, 동공이 확대되고 콧평수가 넓어지고 얼굴이 조금 후끈거렸다.
이번엔 말년의 삶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아버지의 전화를 받아야 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 순간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새는 발음으로 내게 전화를 받아줘서 고맙다고 하며, 본인의 근황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그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조부모가 살던 집을 매입해 살고 있으며, 몇 년 전 심장 수술을 받았고, 이가 다 빠져 틀니를 맞추었다고 했다. 평생 그의 위장관을 타고 흘러갔을 술의 양을 생각하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손자의 나이를 물었지만, 정작 이름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자신의 허물어진 건강은 길게 전하면서도, 자신보다 오래 살지 못할지도 모를 내 어머니의 건강은 묻지 않았다. 과거 우리 가족이 살던 서울 아파트를 함부로 처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랑처럼 말했고, 내 결혼식 날 사위와 악수만 하고 안아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언제 한 번 날을 잡아 사위와 손주를 데리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내려와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다. 나는 그저 “알겠어요”라고 대답했지만, 정작 스스로의 발등을 찧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십 년 만에 연결된 통화를 시작으로, 그날 하루에만 아버지에게서 여덟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물론 두 번째 전화부터는 받지 않았다.
가족을 돌보지 못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뒤늦게라도 돌아보는 기색이 있었다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들었더라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받았을 것이다.
상처받은 기억만 있고, 상처 준 기억은 없는 사람들이 모이면, 남는 건 산산조각 난 가정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