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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디톡스 산책

화기 빼러 나갔다가 건망증만 재확인했다

by 춤몽


일어나자마자 새로운 뉴스를 보려고 포털 사이트를 열었더니, 온통 사건, 사고 기사로 도배되어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극적인 제목에 낚여 내 하루의 시작이 얼룩지고 말았다. 열이 뻗쳐 두피가 좀 뜨끈해진다 싶은 순간, 디아의 저서 <마음이 헤맬 때 몸이 하는 말들>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의 화기(火氣)는 몸을 바꾼다. 머리는 뜨거워지고 몸은 차가워진다. 심장은 빨리 뛰고 소화는 버거워진다.
실제 화기를 운용하는 장기인 신장도
맥을 못 춘다. 간도 무리하게 일하면서
기를 잘 통하게 하는 제 역할을 못한다.
오장육부의 입장에서 보면 스마트폰의 화기는 "화마" 수준이다.


오늘은 단 몇 시간만이라도 휴대폰과 거리를 두기로 한다. 휴대폰은 충전기에 꽂아 두고, 나갈 채비를 한다. 선크림만 가볍게 바르고 캡 모자를 눌러쓴다. 커피숍에서 아이스커피로 내 몸에 쌓인 화기를 식혀야 하니까 텀블러도 야무지게 챙긴다.


햇살이 좋아 밖으로 나섰지만, 아직 덜 달궈진 이른 아침의 그늘은 싸늘하다. 옷깃을 여미며 강아지와 함께 뒷산을 오른다. 봉오리를 터뜨린 꽃들이 앞다투어 "나 좀 보소!" 하며 반긴다. 겨우내 근질근질해서 어찌 참았을꼬. 나도 많이 기다렸어. 봄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와 줘서 반갑고 고마워.


벌써 잎을 하나둘 떨구기 시작한 매화나무 아래를 지나, 진달래가 피어난 오솔길을 천천히 걷는다. 활기 넘치는 어린 강아지는 앞서 가며 목줄을 팽팽히 당긴다. 녀석의 속도에 맞추려 경보하듯 걸으면 허리와 무릎이 시큰거려 자꾸 걸음이 느려진다. 관절염이라기엔 아직 이른 나이, 결국 단기간에 붙은 살 탓이라고 스스로 진단해 본다.

오늘은 걸음 수나 걷는 속도에 집착하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를 찾는 것을 목표로 걷기로 했다.


카톡이나 광고 문자 알림에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걸으니, 풍경과 내 몸의 통증 부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바쁘게 걸을 때는 마음도 덩달아 출렁였는데, 재활 치료하듯 한 걸음 한 걸음 의식해서 걷다 보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런 나와 대조적으로 흥분해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진정시킬 겸, 잠시 티타임을 갖기로 한다. 아이스커피 한 잔 마시기에 딱 좋은 타이밍. 커피숍에 들어서며 의기양양하게 텀블러를 꺼낸다.


"아이스 아메... 아, 아니, 취소요."


평소 ○○페이로 결제하는데, 정작 결제 수단인 휴대폰이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할인받겠다고 텀블러만 챙겨 가면 뭐 하나. 디지털 디톡스를 하기로 했다면, 플라스틱 카드나 현금을 따로 챙겼어야 했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노트북 본체만 챙기고 충전기를 두고 나가는 일은 일상다반사. 사우나에 가면서 필수 용품인 이태리타월을 빠뜨려 매점에서 하나씩 사다 보니, 어느새 타월이 수십 개나 쌓였다.)


기대했던 티타임이 무산되자,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어서 집에 가서 고추장 듬뿍 넣은 양푼 비빔밥을 척척 비벼 먹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다. 돌아가는 길에는 오히려 내가 강아지의 발걸음을 재촉하며 서두른다. 머릿속은 온통 양푼 비빔밥 생각뿐,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살이 안 빠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한살림에 들러 싱싱한 오이, 콩나물, 당근, 표고버섯을 골라 바구니에 담고 계산대로 향했다. 조합원 번호를 누른 뒤 가방을 뒤적이다가 멈칫했다. 그 몇 분 사이에 결제 수단이 없다는 걸 또 잊다니.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직원에게 십 분 후에 다시 올 테니 물건을 잠시 보관해 달라고 부탁하고, 집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이번에는 지친 강아지가 질질 끌려오다시피 한다. 창피함이 관절 통증을 이겼다.


집에서 휴대폰을 챙겨 다시 한살림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늘어난 체중과 관절통, 몸속 화기에 이어 건망증까지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휴대폰 노예의 디지털 디톡스 체험은 두 번의 헛걸음을 낳고 한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그래도 다시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다. 오늘의 실수를 교훈 삼아 내일 재도전해야겠다. 휴대폰은 두고, 현금과 정신은 꼭 챙겨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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