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장만한 신상 수영복
캐리어에 두 남자의 수영복과 수경, 혹시 몰라 아들의 구명조끼까지 다 넣었으니 이제 내 것만 챙기면 된다. 형광 주황색 내 레시가드는 11년이 지나도록 빛바랜 곳 하나 없이 겉은 멀쩡하다. 그러나 지퍼형 긴팔 안에 입는 민소매 상의의 가슴캡이 온전치 않다. 이리저리 캡을 만지며 형태를 바로잡아 보려 애썼지만 복원되지 않는다.
이쯤에서 솔직해지자. 비단 찌그러진 가슴 패드만 문제였을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내 몸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10킬로그램이나 덜 나갔던 시절에 산 레시가드에게 지금의 내 몸뚱이를 보기 좋게 감싸달라 하면 양심이 없는 거다.
우리 가족은 물을 좋아하지만 시끌벅적한 건 싫어해 워터파크와는 맞지 않는다. 남편과 나는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바다 수영은 꿈도 못 꾼다. 그래서 계획한 이번 여행의 테마는 '호캉스'다. 조용한 호텔 실내 수영장에 어울리는 새 수영복을 장만할 절호의 기회다.
여행 일주일 전, 설레는 맘으로 백화점 수영복 코너에 들어섰다. 옷걸이에 질서 정연하게 걸려 있는 수영복들은 형태도 색깔도 참 다양했다. 레시가드는 무조건 제외하기로 한다. 비키니는 언감생심 내가 도전할 영역이 아니다. 삼각 라인의 원피스 수영복은 가볍고 산뜻해 보이지만 탄력 잃은 하체 살을 고스란히 드러낼 자신이 없다.
노출에 보수적인 내가 선택한 것은 반바지형 원피스 수영복. 탄탄한 소재가 무릎 위부터 전신을 감싸줘 체형이 보정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이거 95 사이즈 입어봐도 될까요?"
"90, 95 둘 다 입어 보세요. 사이즈 봐 드릴게요."
90은 10년 전 사이즈였으므로 자신 없지만 일단 탈의실에 들어가 시도해 본다. 살을 접다시피 욱여넣고 직원을 불렀다.
"저.. 아무래도 이건 너무 타이트한 것 같아요. 95 입어 볼게요."
배에 잔뜩 힘을 주어 허리를 잘록하게 만들며 간신히 말했다.
"아니에요, 고객님. 제가 보기엔 이 사이즈가 맞아요. 처음에 입을 때 불편하다 싶을 정도로 타이트해야 해요. 수영복은 물이 닿으면 좀 늘어나고, 몇 번 입으면 헐렁해지거든요."
직원은 수영복 밖으로 삐져나온 내 등살을 정리해 주더니 한 치수 큰 것과 비교해 보라며 95를 가져다줬다.
역시나 95가 한결 편안했다. 하지만 직원은 부분적으로 천이 우는 부분이 있다면서 90이 내게 맞다고 했다. 확신에 찬 그녀의 표정은 95 사이즈에 95퍼센트 마음이 기울었던 나의 선택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내심 '아직 살아있네. 지금도 90 사이즈가 맞는 몸이구나. 불어난 10킬로그램은 지방이 아닌 근육량인가 보다.'하며 어깨뽕이 잔뜩 올라간 채로 씩씩하게 카드를 긁었다.
13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나를 위한 무언가를 사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곧 신상 수영복을 입고 고요한 물속에 몸을 맡길 수 있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