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복 탓을 하면 맘이 편할까 해서
여행지까지 약 다섯 시간의 비행에도 힘든 기색 하나 없는 아들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벌써부터 여독이 잔뜩 오른 나는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기절한 척했지만, 아들은 기어코 내 수영복을 찾아 꺼내 와서는 직접 갈아입혀줄 기세다. 여행 가서 최소한 세 번은 수영장에서 놀겠다고 노래를 부른 아들이다. 첫날부터 김새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도 힘을 내 움직여 본다.
수영복을 새로 샀다고 말로만 들은 남편도 은근히 내 수영복 핏을 기대하는 눈치다.
"여보, 나 아직 90 입는 여자야. 수영장에 먼저 가서 딱 기다리고 있어."
탈의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여행 전에 구입한 신상 수영복에 몸을 집어넣는다. 백화점에서는 직원이 착용을 도와줘서 입기가 좀 수월했는데 혼자 입으려니 녹록지 않다.
'3500피트 상공을 나는 동안 몸이 좀 부었나? 기내식을 좀 남길 걸 그랬나 봐.'
어찌어찌 수영복 안으로 살을 밀어 넣었는데 숨이 턱 막힌다. 입자마자 명치가 답답하고 목구멍에 뭔가 걸린 느낌이다. 내게 90 사이즈를 판매한 직원이 말하길 물에 들어가면 수영복이 좀 늘어난다고 했다. 남편 앞에서 당당한 워킹을 선보일 겨를도 없이 수영장에 냅다 뛰어들었다. 평소에 폐활량이라면 남에게 뒤지지 않는 나인데 고작 25미터 수영하고 나서 머리가 핑핑 돈다.
가슴에 돌덩이가 하나 얹힌 것 같아 얼른 물밖으로 나와 선베드에 드러누웠다. 남편과 아들이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물놀이하는 동안 나는 수영복의 가슴 부분과 어깨줄을 힘껏 잡아당겨 본다. 하지만 아레나 수영복은 물과의 접촉이나 일시적인 외력으로 쉽게 늘어나지 않았다. 역시 글로벌 브랜드답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 어깨살이 눌리다 못해 파이는 느낌이었다. 어깨끈이 닿은 부분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90 사이즈가 내게 맞다고 우긴 점원을 당장 이곳으로 소환해 수영복 암홀을 비집고 기어 나오는 내 겨밑살이 보이지 않냐고, 봉제선을 경계로 소시지가 된 내 허벅지 살을 그때 왜 못 본 척한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자칭, 타칭 '물개'인 나인데 물에서 놀지도 못하고 결국 90호 아레나에게 항복했다.
입은 지 30분도 안 되어 수영복을 벗어던지고(물에 젖은 수영복을 벗는 건 입는 것보다 두 배 힘들었다) 사우나 온탕에 몸을 담갔다. 내 몸의 부피를 실감케 하는 물 양이 탕 밖으로 흘러넘치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90은 내 사이즈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유레카!
수영복 코너 직원은 무죄다. 수영복을 입고 사이즈를 봐 달라고 할 때 편안히 숨 쉬며 배에 힘을 풀었어야 했다. 직원이 90호를 권유했을 때, 그건 10킬로그램이 찌기 전에 입었던 사이즈라고 고백했어야 했다. 앞으로 살이 빠질 거라는 기대를 접고, 지금 당장 입었을 때 움직임이 자유로운 사이즈를 골랐어야 했다.
알겠느냐, 과거의 나여.
남은 여행 기간 동안 수영복을 다시 입을 일은 없었다. 두 남자가 열흘 동안 수영장에 네 번 가는 동안 나는 객실 침대에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빳빳하게 건조된 상태로 옷걸이에 걸린 신상 수영복을 노려봤다. 제값을 못한 저걸 어떻게 처분해야 속이 시원하려나 하면서 말이다.
'13만 원(수영복 구입가) 써서 글감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자...'하고 긍정 회로를 돌려 보지만 계속 에러(error) 코드가 뜬다.
나는 물속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인데 수영복 사이즈 미스로 반쪽짜리 호캉스가 되어버리다니.
내겐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
하아... 구차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아레나는 죄가 없다. 공장에서 찍어낸 사이즈는 오차 없이 정확하다.
애먼 수영복 잡지 말고 내일부터 식단 관리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