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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 맛집에서 마시는 캐모마일 티(tea)

커피 머신도 내 의지에 쫄았나 봐

by 춤몽


잠을 설쳤다.


밤새도록 바람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창을 때렸다. 바람 소리에 놀란 강아지가 왕! 하고 한 번 짖고는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새벽에 속속 올라오는 브런치 글들을 읽다가 나도 월요일에 연재하는 글을 한 편 올리고 동이 틀 무렵에 잠이 들었다. 수면 리듬이 깨져서 그런지 오전에 몸을 다시 일으키기 힘들었다. 이대로 열두 시까지 누워있고 싶었지만 내일은 아들의 새 학년이 시작되고, 남편도 긴 휴가 끝에 다시 업무에 복귀하는 날이라 마냥 풀어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피곤하지만 오늘부터라도 생체 시계를 아들의 학기 중 모드로 전환하고 느슨해진 긴장의 끈을 조여야 한다.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햇살을 가르며 사라졌고, 나는 글을 쓰러 커피숍으로 향했다.

내가 주로 가는 커피숍 두 곳은 집에서 각각 20미터, 500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데, 오늘은 코가 뻥 뚫리는 찬 공기를 마시며 500미터 걷기로 했다. 그곳은 라테가 유난히 맛있다. 라테 특유의 고소함이 진하게 느껴지고 우유도 딱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나온다. 하트 모양 라테 아트가 새겨진 부드러운 우유 거품 위에 입술이 닿는 순간은 나의 소확행 중 하나다.

하지만 오늘은 라테를 마시러 가는 게 아니다.


오늘의 취향 파괴 실험은 '열 번 가면 열 번 모두 라테만 주문했던 곳에서 커피 말고 다른 음료 시키기'.


작은 테이블이 열 개 남짓 있는 커피숍에는 이미 두 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사장님이 눈썹을 시옷자로 만들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라테 드시러 오셨죠? 어떡하죠...? 머신이 고장 나서 오늘 커피 안 돼요. 지금 더치커피만 되는데."


(커피 머신이 하필 오늘 고장 났다고? 온 우주가 내 실험을 응원하는 건가?)


"아, 괜찮아요. 오늘은 다른 거 마시려고 했어요."

다행이라는 듯 사장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칼로리가 높거나 차가운 음료를 제외하니 차(tea) 메뉴에 눈이 간다.


"청귤 캐모마일 주세요."


자리에 앉아 캐모마일의 효능을 찾아보았다. 진정/진통효과, 수면 개선, 항염 작용, 면역력 강화에 좋은 차란다. 이 정도면 만병통치약에 가깝다.



뜨거운 물에 담긴 티백에서 차가 아른아른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우러났다. 물이 연노란빛을 띨 때까지 '아지랑이 멍'을 때리는 5분은 그 자체로 명상의 시간.

뜨거움이 한 김 식은 후, 청귤 캐모마일 티를 홀짝 한 입 삼켰다. 미세하게 단맛이 혀끝에 닿았다가 청귤의 새콤함이 혀의 옆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모금으로 단맛, 신맛, 쓴맛을 느끼는 혀의 부위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현대 연구에 따르면 맛을 느끼는 혀의 부위를 구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혀 전체에 분포된 미뢰를 통해 모든 맛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오늘 분명 혀의 각 부분에서 다른 맛을 느꼈다!)


평소에 티백에서 우러나오는 차를 5천 원 주고 사 먹는 건 나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내가 택한 청귤 캐모마일 티는 5천 원, 아니 6천 원이라도 아깝지 않은 맛이었다.


나 왜 지금까지 여기 와서 라테만 마셨던 거지? 객관적으로 여기 라테가 훌륭하기는 하지만, 카페인의 각성 효과로 인해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종일 산만한 정신으로 살 필요 없었잖아.


캐모마일의 효능을 알고 난 뒤에 기분 탓인지 남은 하루를 지내는 동안 마음이 평온했고, 때마침 맞은 여자의 날에 느끼는 통증도 거의 없었다.


앞으로 여기 차 메뉴에 있는 '레몬베리 히비스커스, 오렌지 자몽 블랙티, 피치가든, 스트로베리 레이디, 머스켓 브리즈'를 도장 깨기처럼 하나씩 마셔 봐야지!



*오늘의 실험 내용

라테 말고 한 번도 안 마셔 본 다른 음료 주문하기.


*실험 결과

별 다섯 개 (대만족), 재도전 의사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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