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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Feb 18. 2023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수치심과 죄의식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치심은 과거의 죄의식에서 생겨납니다. 죄의식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한 것인 반면, 수치심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감정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의 ‘인생 수업’ 중에서


죄의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죄의식에서 벗어나느냐 평생 끌어안고 사느냐는 자신의 선택이겠지요.

“인생 수업”을 읽으며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과거의 잘못과 죄책감.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비난을 멈추고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죄의식과 수치심에 시달리며 헛되이 보낸 시간이 떠오릅니다.


엄마가 새아빠에게 맞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일, 사랑받기 위해 착한 아이인척 연기했던 일, 나를 사랑해 준 사람에게 상처 준 일,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한 일, 말도 없이 일을 그만둔 일, 아무런 준비 없이 임신한 일, 술 먹고 아이를 안고 걷다 넘어져서 아이를 다치게 한 일, 반려견을 파양 한 일, 친구를 배신한 일등등.

죄의식은 끝도 없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과거의 일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심이 차오릅니다.


나는 여전히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이 곧 자신인 양 나를 벌하면서요. 나같이 나쁘고 못된 사람이 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듭니다.

어린 시절의 잘못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 저지른 잘못은 합리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처음 아이를 임신한 걸 안 순간부터 죄의식은 나의 분신과도 같았습니다. 임신 가능성을 알았음에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술만 펑펑 마셔댔습니다.

임신한 걸 안 후에도 나만 생각했습니다. 살이 찔까 두려워 맘껏 먹지 않았고, 귀찮아서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우는 날이 많았지요. 그리고 강박적으로 걸었습니다.

그 결과 아이는 2.24kg의 저체중아로 태어났습니다. 13살이 되었지만 몸무게는 여전히 하위 1%이고, 아토피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이가 너무 말랐다고 하면 죄의식이 고개를 내밉니다. 영양소를 골고루 챙겨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불안도 있고, 아이가 편식이 심한 것도 나의 잘못 같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의심이므로 죄의식은 더욱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십 대의 나의 삶은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 질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나으면 좋아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둘째를 낳으면, 귀여운 강아지를 입양하면.


결혼을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음에도 똑같은 이유로 계속 싸웠고, 아이가 태어나자 더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나는 죄의식을 감추기 위해 모든 걸 남편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속일 수 없었지요.


아이 둘을 낳아 독박육아를 하면서 강아지까지 입양했습니다. 이미 집은 정돈되지 않은 물건들로 포화상태였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여력이 없었는데, 강아지까지 들이니 집은 더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나를 향한 비난과 자책은 나에 대한 신뢰를 무너트렸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니 아이들을 혼자 돌보는 일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지요.


상황만 악화되자 일 년 만에 강아지 ‘보리’를 친척집에 보냈습니다. 어디로 가든 나보다 좋은 주인을 만날 거라 자위했지만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는 그것만으로 큰 상처를 받았겠지요. 환경이 바뀌고 여건이 나아지자 보리를 다시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 또한 죄의식을 덜고 싶은 나의 이기심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친구를 배신했던 일도 생각납니다. 둘만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잘못을 친구에게 떠 안겼던 일.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죄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친구는 나로 인해 오랜 친구들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몇 년이고 기다리다 보면 친구가 돌아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이 친구를 더 불편하게 만들 거란 걸 깨달은 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친구와 관계를 풀고 싶은 것은 친구 마음을 무시한 나만의 생각이었지요.

나와 가까워지고 싶은 의도로 과한 친절을 베풀고, 연락을 했던 분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부담스러워 피하다 결국에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때서야 생각했습니다. 나의 연락을 원치 않는데 계속 연락을 하는 것이 친구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걸. 너무나 당연하고 명확한 일을 그때는 왜 생각할 수 없었을까요? 친구는 이미 떠나고 없는데 나 혼자 추억 속을 맴돌며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아직도 그 친구를 생각합니다. 어쩌면 영영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나 자신이 싫고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살아온 순간순간 죄의식이 쌓이고 쌓여 두꺼운 벽을 이루었습니다. 죄의식이 수치심을 만들고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지요. 정말 나는 그런 사람인 지 모릅니다. 의리 없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나보단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마 나는 셋째를 임신한다 해도 맘껏 먹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친구에게 똑같이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나보다는 나은 선택을 할 거라 생각합니다. 맘껏 먹지 않더라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며 심신안정에 힘쓸 테고, 또다시 친구와의 비밀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해도 나의 잘못을 친구에게 전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온 생명을 저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다짐해 봅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봄이’는 나의 가족입니다. 두 아들과 봄이를 지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아지를 파양 했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단순히 고양이와 성격이 더 잘 맞는다는 말로 과거의 나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나를 용서해야만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나를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한 합리화이겠지요. 그럼에도 과거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너는 그때 네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다고.


“치유의 열쇠는 용서입니다. 용서란 과거를 인정하고 보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했다고 여기는 잘못은 용서를 통해 깨끗이 정화될 수 있습니다. “


나의 변명들로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스스로를 용서함으로 죄의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꿈꿔봅니다.




(인용된 글은 모두 “인생 수업”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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