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무기력증이 찾아온 이유

자기 쓸모와 채식, 페미니즘

by 씨엔미


요즘 기분이 가라앉고 무기력한 것이 겨울이라 그럴까.


집에만 있으면 계속 쳐지는 것 같아 일부러 카페도 자주 갔는데.


새해가 됐다고 목표가 새로 생기거나 하진 않았다.


매달 조금씩 수정을 하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런데 구정즈음부터 꾸준히 해오던 습관들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중요한 일 빼고는 미루거나 빼먹게 되고, 스스로를 나무라는 날들의 연속이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쁜 마음으로 해오던 일들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무기력해짐과 동시에 무쓸모가 된 기분마저 들었다.



“전업주부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생각과 쉬지 않고 싸워야만 해. 불시에, 수시로,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는 ‘내 존재 가치’에 대한 물음이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세우니까 말이야.”-이다희의 <순종과 해방 사이>



전업주부는 불시에 들이닥치는 무쓸모의 기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번 몹쓸 기류에 휩쓸리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가장 유력한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꾸준히 하려고 한 탓이 아닌지.


의욕과 욕심이 앞서서 이것저것을 계획표에 집어넣고, 하루하루 지켜 나가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더랬다.


그렇게 무리가 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고작해야 매일 책 100page 읽기, 매일 글쓰기, 매일 일기 쓰기, 가능하면 뭐라도 매일 운동하기, 그리고 채식.


물론 지키지 못한 날도 많지만, 6개월가량 지속된 습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채식에 관한 신념이 흔들리고 있고, 하루도 빠짐없이 써 오던 일기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운동을 무리하게 하지는 않았으니, 체력 탓은 아니다.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에 지루함을 느꼈으려나?




설에는 시댁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까다로운 사람으로 낙인찍혔으므로, 생선까지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자기 합리화 발동) 동태 전이며 골뱅이무침, 건어물 같은 걸 쉬지 않고 먹었다.


한정된 음식으로 배가 차지 않아 급기야는 아이들을 위해 사놓은 간식에도 손을 뻗치고 말았는데 고소한 크래커 사이에 치즈가 들어간 처음 본 과자에 꽂혀 연달아 몇 봉지를 까먹었다.


명절이라 해이해졌던 걸 인정한다.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한 번 풀린 고삐는 동생이 일본에 갔다가 사온 킷캣 봉지에도 거리낌 없이 손을 뻗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의 집에, 내 방에 들어와 몸도 마음도 쉴 수 있게 되자 자책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완벽한 비건인이 될 수 없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신념을 갖고 버틴 것 치고는 너무 빠르게 무너진 스스로를 한심하다 여길수 밖에.




다이어트와 비슷하다.


절식을 하다가 나중에 입이 트여 폭식을 하게 되는 악순환.


명절이 지나고 지금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유제품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나만의 공간, 내 방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쉬면서도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너무 풀어져 게으름이 활개 치지 않도록 정산하듯 매일 반추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며칠 밖에 안 됐는데도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키고 싶었으나 지키지 못한 것들 사이에서 자책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건 나의 특기다.


‘죄책감’은 이제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원소가 돼버렸다.


죄책감이 너무 깊숙이 스며들어 피와 함께 온몸을 돌아다녔다면,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무기력증에 빠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죄책감은 그 무엇보다 내게 막강한 힘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손쉽게 나를 무너트릴 수 있다.




요즘 모성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페미니즘과 연결이 되었다.


아… 페미니즘에 관한 책은 나를 좌절케 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해하는 스스로가 ‘진짜 힘듦’을 몰라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가부장제의 틀에 갇혀 사는 여자로서, 엄마로서, 결혼이란 시스템과 남편에 대한 불만이 많았는데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에 나온 여성들에 비해 나는 얼마나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으면 남편이 더 미워지고,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게 된다.




나의 무기력은 어디에서 왔는가.


광합성의 부족인가, 죄책감의 발현인가, ’ 페미니즘‘ 관련 책들로 인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아야 했던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나의 한계는 투명하리만치 명확하고, 나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못 박혀 있는 상황 앞에서,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기지촌에 사는 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상시 대기 중이던 죄책감이 내 멱살을 잡아 무기력의 늪에 머리부터 냅다 꽂아버렸다.


매일 몸에 익히려는 좋은 습관들이 무쓸모로 여겨진다.


나를 위한 습관, 채식도 내 마음이 편하고자 시작한 것이다.


채식도 페미니즘도 몰랐을 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하지만 책만 읽으며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신념을 갖고 채식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가지가지하는 사람’이라고 깎아내리는데, 여성 인권에 관한 얘기는 어림도 없지.


물론 지금 나에게는 누구를 설득하고 말고 할 지식도 없다.


지식을 쌓아감에 따라 용기의 새순도 함께 돋아나길 바라본다.


알고 싶은 것은 많고, 새로운 것을 알아감에 기쁨을 느끼면서도 예민하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입 한 번 뻥끗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렵다.


그때 난 스스로를 위선자라고 느끼지 않을 변명거리조차 찾을 수 없겠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유관순 열사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독립운동은 고사하고, 여성 인권을 위해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음에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


어린 나도, 어른이 된 나도 겁쟁이니까.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건 나에게 큰 기쁨이다.


그 기쁨은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처음 채식을 시작할 때 가졌던 선명했던 의지가 흐리멍덩해지고, 마주하게 된 여성 인권의 현실 앞에서 좌절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나에게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알고 싶다.


그동안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만 살았다면, 남은 삶은 나란 사람이 사회와 지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이 생각조차 건방지다.


사회와 지구에 조금이라도 해를 덜 끼치지 위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할 뿐인데.


최소한 잘못을 하더라도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정도는 아는 사람이고 싶다.


내 신발 바닥에 무참히 깔려 죽은 개미가 있다면 무신경한 나의 행동에 반성이라도 할 수 있도록.


지구나 사회에 끼치는 나의 잘못들을 인지만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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