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이어트 말고 직관적 식사>

by 씨엔미

<다이어트 말고 직관적 식사>를 읽고 탈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직관적 식사는 배가 고플 때,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죄책감 없이 즐겁게 먹고, 배가 부르면 기분 좋게 멈추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행복감이 퐁퐁 솟아올랐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니. 성인이 된 후 다이어트 강박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나에게 ‘직관적 식사’는 두려움과 흥분감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다이어트 말고 직관적 식사>에는 10가지 원칙이 나온다. 그중 처음에는 배고픔을 존중하기, 음식과 화해하기, 포만감을 체감하기에 초점을 맞췄다. ‘스위치온’ 다이어트 직후라 내 머릿속에는 나쁜 음식과 좋은 음식이 극명하게 나눠져 있었다. 그 좋아하는 과일과 고구마를 멀리했으며 소스는 모두 저당으로 바꿨고, 혈당 스파이크를 염려해 채소나 단백질을 먼저 먹었다. 샐러드는 마음껏 먹어도 괜찮겠지 싶어 과한 양을 먹었으며 단백질에 집착했다. 배고픔에 반응하기보다 시간에 맞춰 음식을 먹었고, 저녁 7시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 노력했다. 포만감을 느껴 숟가락을 내려놓기보다 허용 음식이라는 생각에 배가 불러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직관적 식사 첫날은 흥분 그 자체였다. 첫날은 스타벅스에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었다. 카페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하는데 커피를 마시면 빵이 절로 생각나 발길을 끊었던 터라 전날부터 어찌나 흥분이 되던지. 그렇게 기대하며 받아 든 쟁반에는 볼품없는 샌드위치가 있었고, 생각만큼 맛있지도 않았다.


‘전에도 이 맛이었나?’


이런 생각이 든 건 샌드위치뿐만이 아니었다. 다이어트할 때 그렇게 맛 좋던 그릭 요구르트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금지했던 달달한 그래놀라를 잔뜩 올려도 감흥이 떨어졌다.

하루는 빵집에서 먹고 싶었던 빵을 잔뜩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죄책감 없이 빵을 먹는 게 얼마 만인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빵을 아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크림빵 먹방에 환장했기에 당연히 크림빵을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런데 ‘직관적 식사’를 하며 알게 됐다. 내가 크림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크림이 가득 든 빵은 맛은 있었지만, 맛에 대한 만족감보다 속이 너무 느글거려 불쾌감이 더 컸던 것이다.

‘스위치온’ 다이어트를 하며 크림빵 다음으로 먹고 싶었던 음식이 배달 음식이었다. 그래서 ‘직관적 식사’를 핑계 삼아 배달 음식을 마구마구 시켜 먹을 예정이었다. 떡볶이, 치킨, 피자, 햄버거, 마라샹궈, 연어롤 등 목록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언제든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구미가 확 당기지 않았다. 70일 가까이 ‘직관적 식사’를 하며 떡볶이, 햄버거, 마라샹궈를 각각 한 번씩 시켜 먹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치킨은 여러 번 시켜 먹었지만, 내가 배달음식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려와 달리 배달 음식은 싱겁게 흥미를 잃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한 번 과자를 먹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아 감정적 식사를 하는 날도 잦았고, 과식과 폭식을 넘나드는 날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직관적 식사’를 시작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지만 무섭고 두려웠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괴로워했는데 신기하게도 한 달이 지나자 식욕이 잡히기 시작했다. 식욕이 안정화되자 과식하는 날도 현저히 줄었다. 이제는 과자를 먹어도 한 번에 다 먹지 않고, 남으면 무조건 지퍼백에 담아 둔다. 내 방에는 과자로 가득한 간식 창고가 따로 있는데 손만 뻗으면 먹을 수 있는 과자들을 요즘은 나보다 큰 아들이 더 자주 꺼내 먹는다.

‘직관적 식사’를 하며 체중을 재지 않아 몸무게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생각만큼 많이 찌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몸무게도 몸무게지만 뱃살 때문에 콤플렉스가 컸는데, 과식을 하지 않으니 예전만큼 심하다 싶을 정도까지 배가 치솟진 않는다. 지금보다 마른 몸이었을 때도 항상 뱃살이 흘러넘쳤기에 그것만으로도 ‘직관적 식사’를 이어 갈 이유가 충분했다.

탈 다이어트를 선언했지만 여전히 다이어트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시로 뱃살을 체크하며 과식을 한 날에는 살이 찔 거라는 두려움에 곧잘 우울해졌다. 붓는 게 신경 쓰여 대상포진 치료용으로 먹고 있던 소염진통제를 내 마음대로 중단하기도 했다.

이십 년 넘게 다이어트를 해 왔다. 그동안 안 해 본 다이어트가 없고, 한때는 다이어트 책이란 책은 모조리 사 읽었다. 두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함께 했던 ‘다이어트 자아’는 나라는 사람의 결정체이자 핵심이었다. 몇십 일 ‘직관적 식사’를 했다고 다이어트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 음식을 먹는 매 순간 다이어트 상식으로 무장한 자아는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탄수화물만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단백질이 부족해.”

“혈당 스파이크가 올 거야.”

“먹은 만큼 움직여줘야지!”

‘다이어트 자아’는 나를 속이거나 회유하기도 한다.

“넌 지금 라면이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밥 해 먹기 귀찮아서 라면 생각이 난 걸 거야.”

“과자 말고 일단 고구마를 먼저 먹어 보자. 넌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빨리 열량을 채우고 싶은 것뿐이야.”

“이 시간에 먹는다고? 넌 분명 소화가 안 돼서 잠을 제대로 못 잘 거야. 내일 먹자!”

밥 해 먹기 귀찮았던 건 맞지만 정말 라면이 당겼을 수도 있다. 열량을 채우고자 과자가 당겼을 수 있지만 정말 과자가 먹고 싶었을 수도 있다. 소화 기능이 안 좋아 늦은 시간에 먹으면 안 되지만 한, 두 입 정도 먹는다고 소화가 안 되진 않을 것이다.



오늘도 ‘다이어트 자아’에게 설득 당해 과자와 라면을 먹지 않으려 했다. 과자와 라면이 건강에는 좋지 않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식욕이 없어서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오늘은 과자와 라면이 먹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식욕이 날뛰는 것도 곤욕스럽지만, 식욕이 너무 없어도 곤란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서 깨고 신성한 의식처럼 혼자만의 식사 시간을 즐겼는데 식욕이 없으니 밥 먹는 시간이 기다려지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사는 재미가 롤러코스터의 내리막처럼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먹는 즐거움이 뭐라고, 뭘 해도 감흥이 떨어졌다. 마치 선명하고 또렷한 세상에 회색빛 필터가 끼워진 듯이.

​​

여전히 나는 나의 진짜 욕구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이어트 자아’의 속삭임이 진실일 수도 있다. 이십 년 넘게 나의 욕구를 무시하거나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살아온 대가로 난 내가 먹고 싶은 음식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도 ‘직관적 식사’ 덕분에 나를 탐색하며 알아갈 기회를 얻었다. 본능에 충실한 어린아이처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에 거침없이 손을 뻗는 솔직한 사람이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

총알도 뚫지 못할 만큼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했던 나는,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속살을 보기 위해 사포질을 시작했다. ‘직관적 식사’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진실은, 더 이상 다이어트에 갇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겉모습에 연연하느라 수없이 짓밟았던 나의 진심, 그 무력한 속삭임에, 이제라도 온 마음을 다해 귀 기울여 들어주고 싶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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