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6일을 견디게 해 준 세 권의 추리소설
남편과 심하게 다퉜다.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눈치를 살폈다. 부부싸움을 하면 아이들이 가장 먼저 걱정되는데, 남편은 나보다 무딘 것일까. 아이들이 있건 말건 시비를 걸어온다. 아니면 내가 아이들 앞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걸 이용하는 걸까. 이유가 무엇이건 짜증과 혐오가 밀려오는 건 매한가지다.
결혼 15년 차가 넘어가면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치부까지 서로 알게 마련이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조금 더 무던해지거나 현명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나는 이기적이다. 남편에게 맺힌 원한을 화석처럼 마음 한구석에 층층이 쌓아 올리고 있다. 언젠가 머리가 기억을 못 하더라도 감정은 잊지 않게. 난 뒤끝 있는 여자다.
이번 싸움은 평소보다 더 졸렬하고 야비했다. 비겁하고 치사해서,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아이들이 없었다면 백번도 더 헤어졌을 것이다. 하필 최근에 본 글이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부모가 이혼해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 참고 살겠다는 희망마저 물 건너간 셈이다. 사실 서로 비난하는 말만 하지 않아도 깊은 다툼으로 이어지진 않을 텐데, 우리는 참지 못한다. 누가 더 깊은 상처를 주나 내기하는 사람들처럼 달려들고, 한번 물면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우리가 비열하고 유치하게 싸울 동안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결코 아이들에게 그런 상처는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미쳐 날뛰고 말았다.
이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은 과하게 날뛰었다. 내가 전업주부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불안에 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사자인 나조차 전업주부의 노동을 인정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데, 누가 나의 가치를 기꺼이 인정해 주겠는가.
평생을 불안증에 시달리며 살아서일까, 나는 나를 진정시키는 법을 안다. 대책 없는 낙관으로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받을 상처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가족을 지키고 싶었다. 폭력을 일삼던 남편을 떠나지 못한 엄마를 원망했으면서도, 이혼만은 피하고 싶었다.
불안은 지독한 다이어트이기도 하다. 심장이 떨리고 가슴이 울렁거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고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새해를 맞아 세운 모든 루틴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남편은 1월 한 달간 금주와 금연을 다짐했으나 결국 이날 술을 마셨다. 나 역시 금주 중이 아니었다면 무조건 술을 마셨을 테니 누굴 비난하겠는가.
불안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비난했지만 방치했다. 감정을 글쓰기로 쏟아내면 좋으련만, 일기조차 쓰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랠 수 있을까만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직관적 식사'를 시작하며 먹방을 끊으니 넋 놓고 볼 영상도 없었다. 빌려온 책들이 쌓여 있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한 권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해야 했다. 최악의 상황만을 반복 재생하는 머릿속 버튼을 멈추기 위해 나는 추리소설을 집어 들었다.
추리소설을 읽을 땐 다른 걱정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범인이 누구인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만 쫓으면 된다. 불안증에 시달리던 6일간 세 권의 추리소설을 읽었다.
첫 번째로 읽은 책은 리안 모리아티의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가정폭력을 당하며 이혼을 생각하는 셀레스트에게 공감하며 이입했다. 소설 속 이혼을 고민하는 셀레스트의 이야기는 나를 안도하게 했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그의 삶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래, 나만 힘든 건 아니야. 적어도 우리는 폭력이 오가지는 않잖아.’
두 번째 책인 <사일런트 페이션트>에서는 어린 시절의 상처로 고통받는 인물들을 만났다. 그들의 극단적인 상황에 나를 대입하며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발화점이 되어 사건이 터진 것이 아니라, 결국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고.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들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신병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나의 이런 생각이 누군가에겐 무지하고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거대한 트라우마 앞에 '선택'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무력한가. 하지만 <사일런트 페이션트>를 읽으며 내가 필사적으로 매달린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했을지 모를 선택의 틈새'였다. 앨리샤와 테오의 비극이 오로지 결정된 운명이었다면, 나 역시 유전된 불안과 환경의 굴레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비극의 관성 대신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기를, 그래서 나의 미래 또한 과거에 저당 잡히지 않은 오롯한 나의 선택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절박한 바람이었다.
세 번째 책 <허즈번드 시크릿>에서는 이혼의 위기에 처한 테스에게 마음이 갔다. 책 제목이 <허즈번드 시크릿>인데 잘난 남편의 비밀보다 테스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가 더 흥미진진했다. 테스를 응원하며 쌍둥이처럼 자란 사촌과 바람이 난 남편을 용서하지 않길 바랐다. 남편 없이도 아이와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 나에게는 그런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반전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도 어느새 제 속도를 찾는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면서 나와 비슷한 상황의 인물에게 위로나 위안을 받을 수 있어 이번 위기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추리 소설은 내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불안 속에서도 소소한 재미를 느끼고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또 다른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으로 내일 아침을 기다리게 해 주었다.
다음 날을 기대할 수 있는 마음이 나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아침에 먹을 음식 생각에 눈을 뜨더라도 기대감을 안고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날은 어떻게든 버티게 된다. 하찮고 작은 기대 하나 만으로도 내일 아침 눈을 떠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내일 먹을 음식과 읽게 될 책은 내일의 나를 상상하게 한다. 만약 내일을 상상할 수 없다면 영원히 깨지 않는 잠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이 하찮고 작은 기대감이 오늘 하루를 살게 한다. 그리고 낡은 침대 위에 기어이 몸을 누일 용기를 준다.
-이미지는 AI로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