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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Oct 30. 2022

나의 삶을 변화시킨 것들

어린 시절 상처와 대면하기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상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주위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들 말이다. 나에게는 그중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가장 컸고, 그 상처들은 거대한 바위가 되어 그대로 나의 삶을 짓밟았다. 상처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 수록 그것들은 더욱 나를 잡아당겼고, 나를 갉아먹었으며 결국에는 우울의 늪에 빠지게 했다.


20대 땐 나에게만 그런 상처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들 평범한 가정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아서 부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평범한 가정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다. 가난한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집에서 사는 것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그때 나에겐 의지할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고통을 견뎌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을까 어린 내가 안쓰럽고 안타깝다. 어린 나를 따뜻하게 앉아줄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나의 잘못이 아닌데도 모든 것이 내 잘못 같았던 그 시절의 나를 따뜻하게 꼭 안아주며 함께 울어주고 싶다.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열두 살의 첫째는 이제 뭘 좀 알게 됐나 보다. “우리는 행복한 가족인 것 같아서 좋아”라는 말을 하며 밝게 웃는 아이.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가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것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절실하게 바라고 원했던 평범하지만 따뜻한 가족. 가족 안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기만을 바랐지만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앞에 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가족을 사랑하는 아들들과 함께 만들 수 있어서 행복하다.


사실 우리 가족이 마냥 행복한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힘든 일 하나쯤은 있듯, 우리에게도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있고 금전적으로도 아주 힘든 시기다. 다른 부부들처럼 부부싸움도 하고 두 아들은 안 싸우는 날이 손에 꼽힐 정도다. 그럼에도 아들은 행복한 가족이라고 한다. 아마도 안정된 사랑을 느껴서일 것이다. 첫째는 특히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집에서 편안함, 따뜻함, 안정감을 느낀다. 이것들은 집에서 누려야 할 당연한 것들이다. 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의 집은 두렵고 무섭고 불안했고, 공포감만 가득했다.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마음이 불안해졌다. 늦게 들어왔다고 혼날 것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땐 늘 이 공포감과 함께 였다. 어둑어둑해진 저녁, 다른 집에서는 맛있는 찌개 냄새가 골목골목에 흘러넘쳤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두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창문으로 보이는 다른 집들은 따뜻하고 평온해 보였지만,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은 편안하고 안전한 집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집으로 가야 했다. 다른 갈 곳이 없었을뿐더러 여하튼 그 집은 나의 가족이 있는 나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그 집은 내 꿈의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몇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지독하고 끈질긴 생명력. 이사를 다섯 번이나 했지만, 내 꿈속에서의 집은 언제나 그곳이다.


첫아들을 낳고 키우면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과 대면해야 했다. 뭣도 모르는 작디작은 아이에게 짜증을 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아이를 때리기도 하는 나의 모습.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엄마 같은 엄마가 되어 있었다. 한번 소리를 지르거나 아이를 때리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힘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흥분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그것이 그렇게 화가 날 일인지 확신도 없이 폭주하는 분노에 끌려다녀야만 했다. 그쯤 되면 아이에게는 물론, 나에게도 상처가 된다. 아이의 자는 얼굴을 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지만, 그때 느꼈던 죄책감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가 받은 것이 그것이었기에 그것밖에 줄 수 없었던 그 시절.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좀 더 많이 예뻐해 주고 사랑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이의 세 살 무렵 사진을 보면 죄책감에 속이 쓰리고 밝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아리다. 그 시절 나는 처절하게 싸웠다. 나의 본능과 이성이 피 튀기며 싸우다 뒤엉켜 나뒹굴었고, 엎치락뒤치락했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시킬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많은 육아서 덕분이다. 어떤 책들은 나를 한없이 작아지고 죄책감에 잠 못 이루게 했지만, 어떤 책들은 나에게 괜찮다며, 노력하면 변할 수 있다고 위로해 주었다. 나는 육아서를 쓴 사람들처럼 대단한 부모는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상처를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금씩 변화하는 엄마는 될 수 있었다. 아직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불쑥 튀어나와 아이에게 손을 뻗칠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할 때도 있고, 차갑고 냉정한 눈빛으로 아이를 안절부절못하게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에게 잘못을 했을 때는 바로 마음이 불편해지고 미안해져서 누구보다 사과를 잘하는 엄마라는 것이다. 아이에게 사과를 할 땐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지만, 아이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고,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아이에게 평생 남는 것이기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최고이지만 그런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상처를 주었다면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빠른 사과가 정답이다. 부모의 진심 어린 사과에 아이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안정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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