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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Nov 10. 2022

마른 몸매에 대한 집착

여자는 풍채

초등학교까지는 심하게 마른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 살들은 내 뼈들을 집어삼키듯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때부터 내 몸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커져버린 가슴, 불룩 튀어나온 배와 엉덩이, 터질 것 같은 허벅지. 변해버린 몸은 나에게 수치감을 주었다.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거부감부터 들었던 것이다. 분명 장점도 있는 몸인데 단점만 부각되어 보였다. 키도 큰데 살까지 찌니 몸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고 사람들 눈에 유독 잘 띄는 것 같아 어깨와 가슴을 움츠리고 다녔다. 그래서 지금은 안으로 말린 어깨가 펴지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 내 몸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졌다. 내 자신이 싫어서 몸을 싫어하게 됐는지, 내 몸이 싫어서 나를 더 싫어하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오직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날씬하다면 모든 게 완벽 해질 텐데’

나의 모든 문제들이 날씬해지기만 하면 해결될 것 같았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내성적인 성격, 자신감 없고 자존감 낮은 모습, 무기력하고 나태한 삶들이 날씬해지기만 하면 모두 변화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집착했다.


20대는 끝없이 다이어트에 도전하고 실패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다이어트 실패의 스트레스는 폭식과 폭음으로 이어졌고,  다음날은 종일 자책으로 괴로웠으며 한층 더 나를 싫어하게 됐다. 만족스럽지 않은 몸으로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서 외출도 꺼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했던 나머지 뾰루지 하나만 나도 모든 사람들이 그것만 볼 것 같았다.


결혼을 할 때는 많은 여자들이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그때만큼은 누구보다 예뻐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때조차도 날씬한 신부가 될 수 없었다. 그때의 그 좌절감이란. 모든 것이 끝난 느낌이었다. 여자로서 가장 예쁘고 빛나야 할 때가 그때라고 생각했고, 난 그때를 허무하게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내 몸 자체가 게으름의 상징같이 느껴졌고, 약한 의지력에 자괴감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난 엄마에게 게으르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말이 듣기 싫으면서도 정말 내가 게으른 것 같아서 자신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거기에 살까지 찌고 나니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 같았다. 20대 때의 나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몸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편견이 나를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편협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특히 내 자신에게는 더더욱 깐깐한 잣대로 재고 판단했다. 내 자신을 너무 잘 알기에, 내 삶이 게으르고 나태했다는 걸 알기에 살이 빠지지 않고서는 게으름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열심히 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고, 식욕에 지배당하는 모습은 숨기고 싶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흥분하며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아직도 남편과 아이들 앞에서 말고는 마음 편히 밥을 먹지 못한다. 술이 들어가면 모를까 이성이 차갑게 깨어 있을 땐 음식 앞에서 주춤하고 망설인다. 식탐이 앞서 허겁지겁 음식을 먹으면 ‘그러니까 살이 안 빠지지’라는 말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그것은 나의 내면의 소리였다.


마흔이 넘은 지금은 나를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림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요리에는 소질이 없으며 아이들 교육에 열성적이지도 못하지만,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조율하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것은 금주 이후에나 가질 수 있는 만족감이기에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 오래되지는 않았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변화된 삶 속에서도 여전히 몸무게에 집착하고 있는 내가 있다. 나는 강박적으로 운동을 하고 먹는 것을 조절한다. 운동을 하면 개운하고 뿌듯한 성취감도 있지만, 내면에는 살이 찔까 두려운 마음이 짙게 깔려 있다.


금주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요즘, 꺼림칙한 것이 있다. 금주를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빠진 살. 이것이 내 행복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주를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찾고 그 길로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 모습에 만족지수가 높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줄어든 몸무게가 그 만족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의 변화들이 순수해 보이지 않았다. 결국은 이것이었나? 살이 빠지지 않았어도 난 지금처럼 만족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찝찝하다.


난 언제쯤이면 몸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할머니가 되어서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의 엄마는 예순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뱃살을 신경 쓰신다. 나만의 문제가 아닌 여자들의 문제인 것 같다. 내 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는 모르겠다. 문화적인 영향도 있겠고, 결핍에 대한 영향도 있을 것이다. 나는 살이 빠져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조차도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없었고 불룩 튀어나온 뱃살을 보며 혐오감을 느꼈다. 뼈를 느낄 수 있는 마른 몸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원래 내 몸은 이런 상태였는데 탐욕스러운 욕심이 나를 살 찌웠다고 생각하니 뚱뚱하지도 통통하지도 않은 평범한 몸에서도 불안감을 느꼈다.

올여름엔 식욕이 없어서 배만 채울 정도로만 음식을 섭취했다. 먹는 음식과 먹는 양을 조절하는 것이 쉬웠다.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식이장애가 오는 것이 아닌지. 폭식과 거식은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한다. 시작은 다를 수 있지만 결국은 삶에 대한 분노와 나에 대한 불만족을 몸을 혹사시키며 표출하는 것이 아닐까?

다행히 가을이 되어 식욕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위가 줄어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다음날까지 소화가 안 돼서 힘들다. 먹고 싶은 것은 많은데 많이 먹지 못하고, 많이 먹지 않도록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의 김하나, 황선우 작가님은 “여자는 풍채”라는 말을 하신다. 그 말을 들으면 속이 뻥 뚫리듯 통쾌한 기분이 들지만, 막상 난 그 말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씁쓸하다. 분명 날씬한 몸이 아니더라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와 그들의 차이점은 뭘까? 어린 시절에 충분한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한 것? 한없이 낮은 자존감?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던 허기? 혼자임을 절절하게 느꼈던 외로움과 공허함?

내가 마른 몸에 집착하는 건 하나의 문제가 아닌 다른 많은 문제들의 집합체 같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요즘, 그것은 적절한 몸무게가 전제조건으로 깔려 있어야 했던 것이었고, 그러므로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내가 몸무게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나에겐 그것을 뺀 나머지의 행복이 최대치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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