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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Dec 18. 2022

휘갈겨 쓰는 글쓰기

모닝 페이지

모닝 페이지를 쓰기 시작한 지 70일이 됐다.


“모닝 페이지는 매일 잠에서 깨자마자 의식의 흐름을 종이 세 장에 기록하는 것이다.”

“잠에서 깰 즈음부터 자기 방어가 작동하기까지 45분 정도의 시간이 있다고 한다. 방어가 해제된 자신을 붙잡고 대화하면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되고 그 진실은 자아가 해석한 상황과 전혀 다를 수 있다. 진짜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솔직함을 습관화한다.”

-줄라아 캐러런의 <아티스트 웨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 중에서


나는 세 장까지는 쓰지 못하지만 그날에 따라 쓰고 싶은 만큼의 글을 쓴다. 금주를 했기에 시작할 수 있었고, 지속할 수 있었던 일이다.

평일에는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지만 주말에는 깨는 대로 일어나서 모닝 페이지를 쓴다.


처음 모닝 페이지를 쓸 때는 비몽사몽 상태에서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쓰려고 노력했다.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도 아무렇게나 휘갈겨 쓰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공책에 글씨를 쓸 때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리고 다시 썼다. 삐뚤빼뚤하거나 어우러지지 않고 유독 튀는 글자를 지우다 지우다 못해 성질에 못 이겨 찢어버린 것이다.

나의 성격이 그렇다. 까칠하고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나 할까? 이런 성격 탓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어렵다. 어차피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청소를 할 때도 마음 같아서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리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곳만이라도 대충 정리하고 보이지 않는 곳은 엉망인 채로 방치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모른 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 한편에는 계속 엉망인 곳이 신경 쓰이고 마음이 불편하다.

글을 쓸 때도 일단은 그 주위만 정리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곳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생각을 분산시킨다. 정리, 정돈이라는 것이 삶에서 이리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다 버리고 싶지만 버리는 것도 게으른 사람에겐 어려운 일이다.


요즘 모닝 페이지를 쓸 땐 글씨를 멋대로 휘갈겨 쓴다. 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익숙해져서 힘이 빠진 것도 있지만 휘갈겨 쓴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힘을 빼고 부드럽게 펜이 가는 대로 쓰인 글씨를 보면 통쾌하기까지 하다. 억눌린 감정들이 펜을 통해 맘껏 쏟아져 나오고 글자들이 자유롭게 노트 위를 활보한다. 남들에게 보여줄 리 없는 일기를 쓰면서도 정성껏 꾹꾹 눌러쓰던 내가 힘을 빼고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씨는 엉망이지만 빠르게 생각을 써내려 갈 수 있고, 이제야 제대로 된 필기체를 쓰는 것 같다. 영어로 쓴 필기체가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휘갈겨 쓴 글씨도 조금은 멋져 보인다. 별것도 아닌 것에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낀다.


‘브런치’ 글을 쓸 때도 마음껏 쓰고 싶다. 발행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생각나는 대로 휘갈겨 쓰고 다듬어서 괜찮다 싶은(지극히 주관적인) 글을 올리면 될 일이다. 발행을 할 수 있는 글만 써야 된다는 생각에 키보드 앞에 앉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글쓰기가 좋아서 시작한 ‘브런치’인데 누군가 내 글을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럽고 손가락이 뻣뻣해졌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쏟아지지만 쓸 수 있는 글을 찾기 위해 많은 생각들이 걸러지고 폐기된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버려지는 것이겠지만, 여하튼 내가 느꼈을 순간의 생각들을 곱씹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발행을 하지 않더라도 순간순간 강렬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두 글로 쓰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것들이 나중에 글감이 될 수도 아무것도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그때의 생각을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글씨를 휘갈겨 써 내려가며 자유로움을 느끼듯 발행을 염두하지 않고 쓰는 글이 가볍고 편해졌다. 글을 쓰기 위해 앉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고, 어떤 중압감도 느끼지 않는다. 난 그저 나의 생각들을 써내려 갈 뿐이고, 발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맘껏 쏟아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든든하다.


라이킷 수에 절망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이다. 나에게는 글 쓰는 과정이 즐거운 것이고, 결과도 좋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글쓰기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서랍에 글들이 쌓일수록 조금이라도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치관들이 자리를 잡아가듯, 글을 쓰면서 가치관들이 정리가 된다. 가치관과 생각은 끊임없이 변해갈 테지만 더 나다운 글을 쓰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가치관이 확립되면 좀 더 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수도.

그런 날이 오지 않더라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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