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 이야기 9 - 경의선 열차

by 서유정

9월 첫째 주, 나는 새로운 교복을 입고 다른 학교로 향했다. 길이 조금 더 멀었고, 교문은 더 높았으며, 교복 색은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 마주한 담임선생님의 얼굴도, 낯선 교실의 공기도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낯설었던 건, 규창이 없는 하루였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걸음을 나란히 하지 않아도, 가방을 들어주지 않아도 함께 있었던 누군가의 부재는 공간의 크기마저 달라지게 했다. 학교로 향하는 골목길, 가로수 사이의 하늘, 책상 앞에 앉는 자세마저 달랐다. 규창이 없는 모든 것들이 조용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이후, 그의 편지를 다시 여러 번 읽었다. 줄마다, 단어마다, 문장 끝의 마침표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보려 애썼다. 규창이의 필체는 조심스러웠고,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 마치 말을 아껴 담아낸 음성처럼 들렸다.

규창이는 나의 첫사랑이자, 첫 번째 거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만의 작은 신이었다. 내가 나임을 알게 해 준 사람.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린다. 무작정 복도를 걷던 그 걸음, 말없이 함께 하던 그 침묵, 그리고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자전거 길.

어떤 순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깊게 스며든다. 마치 오래된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향수처럼. 가슴 한가운데서 문득 피어오르는 기억의 향.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몇 해 전, 나는 무작정 경의선 열차를 탔다. 서울 변두리인 그곳이 재개발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모래내 역을 지나, 화전역까지. 그때보다 훨씬 성숙한 얼굴로,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열다섯 소녀처럼 설레고 있었다. 어쩌면 열다섯의 그 소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플라타너스 길은 여전했다. 아니, 예전보다 더 크고 든든하게 자라 있었다. 수많은 계절을 지나온 나무는 잎의 색깔이 조금 더 짙어졌고, 그 그늘은 예전보다 더 넓어져 있었다. 나는 한참을 그 길 아래 앉아 있었다. 손바닥만 한 잎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플라타너스는 알고 있겠지.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우리들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

그 자리에 규창이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외롭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고, 그의 편지는 아직도 내 책상 서랍 속에 살아 있었다. 그에게 길들여졌던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 지구 별에서 나에게 마음을 쏟아준 첫 번째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플라타너스 잎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규창아. 나 잘 있어. 그리고...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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