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 이야기 5 - 코스모스

by 서유정

프랑스 학생들은 학교 다닐 때 시 200편 정도를 암송한다고 한다. 프랑스에 살아본 적도 없는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국어 선생님 덕분이었다. 국어 선생님은 항상 시를 외우게 하셨다. 선생님은 독특한 분이었다. 수업을 시작하실 때면 조용히 창가를 바라보며 시 한 편을 읊조리셨다. 마치 오늘의 날씨에 가장 어울리는 시를 찾아온 사람처럼, 그날의 분위기를 시로 여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이 시, 다음 주까지 외워오세요."

교과서에 실린 시뿐 아니라, 교과서 밖의 더 깊고 섬세한 시들도 종종 과제로 내주셨다. 백석, 윤동주, 김소월, 박목월. 이름만 들어도 향기 나는 그 시인들의 언어를 입안에 넣고 되뇌는 일이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나중엔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친구들이 수학 문제집을 푸는 시간에 나는 시집을 들고 혼자 속삭이듯 외웠다. 한 구절씩 따라 읽다 보면, 세상이 조금 덜 시끄럽게 느껴졌다.

국어 실기점수는 다른 과목과 달랐다. 시 암송이 그 기준이었다. 목소리의 높낮이, 감정의 흐름, 정서의 전달력까지 평가 대상이었다. 요즘 같으면 수행평가 중 하나쯤으로 여겨졌겠지만, 당시에는 선생님의 열정이 만든 독창적인 평가 방식이었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국민이 시를 많이 알아야, 품격 있고 우아하게 살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천박한 언어를 쓰고, 하찮은 생각을 하며, 결국 비열한 인간이 되지요.”

그 말씀이 맞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시를 열심히 외웠다. 그렇게 따라 외우던 시들은 나도 모르게 마음에 남아, 지금도 가끔 문득 떠오른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볼 때,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혼자 걸을 때, 선생님의 그 느리고 조용한 낭송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된다.

선생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소설은 타인의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시는 자신을 직면하는 문학이에요. 시를 읽을수록 자기 자신이 보여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마음의 길을 잃고 헤매던 사춘기, 나는 누군가의 말 대신, 내 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감정이 복잡하고, 자주 흔들렸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도 시를 많이 읽어서, 어느 날 갑자기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아무렇지 않게 '이게 내 마음이야'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험이 끝난 날이면 시내의 대형서점을 자주 찾았다. 동네 서점에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많았지만, 시집은 거의 없었다. 손때 묻은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교보문고에 가면, 시집 코너에서 시간을 보내며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조용한 언어의 세계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이었다.


기말고사 마지막 날. 시험은 일찍 끝났고, 아이들은 들뜬 얼굴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대부분은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관에 가거나 롤러 스케이트장에 갔다. 이번에는 광화문에 새로 생긴 롯데리아에 가자고 친구들이 제안했다. 햄버거라는 걸 먹어본 적이 없었던 나도 궁금했다. 교보문고도 근처에 있으니 겸사겸사 따라나섰다.

매장 안은 미국 영화에서 보던 장면처럼 번쩍거리고 시끄러웠다. 햄버거, 감자튀김, 콜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약간 어색한 기분이었다. 학교 앞에서 먹는 떡볶이 맛도 아니고, 집에서 끓여 먹던 김치찌개의 맛도 아니었다. 더구나 빵집에서 사 먹던 식빵이나 단팥빵 맛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국의 맛.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 이게 바로 미국이구나 싶었다.

우리가 정신없이 먹고 있을 때, 윤선이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우리 재네들이랑 합석할까?”

고개를 돌리니, 저쪽 테이블에 우리 학교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1반 아이들. 윤선이 남자친구도 있었고, 그중엔 최규창도 있었다.

“너 그러기만 해 봐. 나 집에 갈 거야.”

“어휴, 알았어, 알았어. 조선 시대 요조숙녀 오셨네. 넌 다 좋은데 오픈 마인드가 없어.”

내가 째려보자, 윤선이는 입을 꾹 닫고 콜라를 마셨다. 나는 기분이 좀 상했지만, 그 말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교보문고에 갔다. 여전히 책장은 높고, 사람은 많았다. 책의 숲에서 나는 윤동주와 백석의 시집을 골랐다. 솔직히 말하면, 시가 좋아서인지 작가의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모르겠다. 뭔가 점잖고 순한 분위기, 말보다는 침묵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책장 사이를 걷다 코너를 돌자, 그곳에 최규창이 있었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학교 밖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치니 어쩐지 어색하고, 동시에 기분이 이상하게 좋아졌다.

“책 사러 왔나 보구나. 뭐 골랐어?”

“음, 국어 시간에 쓸 시집. 넌?”

“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코스코스? 그거 꽃 아니야?”

“가을에 피는 꽃도 코스모스고, 우주도 코스모스야. 지구, 태양, 별들... 그 모든 걸 포함한 우주.”

나는 살짝 당황했다. 나 너무 무식한 거 아닐까? 비웃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규창이는 천천히, 아주 성실하게 이야기했다. 설명을 할수록, 그의 눈동자는 더 깊어졌다.

그는 <어린 왕자> 이야기를 꺼냈다. 작가가 원래 비행사였고, 자기도 한때는 비행사를 꿈꿨지만 지금은 천문학자가 되고 싶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대. 별을 만든 원자나 우리 몸을 만든 원자나 똑같대. 한번 공부해보고 싶어.”

“그럼 언젠가는 진짜 별까지 가보는 거야?”

“응. 나중엔 가보려고.”

나는 규창이가 하는 말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때 그 아이의 눈동자는 분명 기억난다. 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해졌다.

규창이는 내가 학교에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은 왜 별을 보며 소원을 비는 걸까. 우주는 끝없이 먼 것 같지만, 실은 우리 안에도 있다는 걸 규창이 덕분에 알게 됐다.

나는 지금도 밤하늘을 볼 때마다 별을 통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우주 속의 시공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도 모두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열다섯의 여름, 우리는 잠시 같은 별에 머물렀다. 우주는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만남은 기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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