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 이야기 6 - 플라타너스

by 서유정

개학하고 나서 비가 자주 왔다. 그것도 큰 비가. 가느다란 실비가 아니라, 마치 하늘이 참아온 울음 주머니를 터뜨리는 것처럼 퍼붓는 큰비였다. 비는 날마다 다른 표정을 하고 찾아왔지만, 그날 아침의 비는 유독 사나웠다.

나는 학교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먼 거리에서 통학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학교로 오려면 버스에서 내려 굴다리 밑을 지나야 하는데, 그 굴다리는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금세 물이 차오르곤 했다. 장화를 신어야 할 것 같은 날씨에, 나는 얇은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우산을 썼지만 무릎 아래는 다 젖었고, 치맛자락도 축축하게 늘어졌다. 온몸이 젖은 상태로 학교에 겨우 도착했을 때, 복도는 놀랍도록 조용했다. 나는 텅 빈 복도를 홀로 걸었다. 우산을 접는 손끝은 얼어붙은 것처럼 떨리고 있었고, 속에서 묘한 긴장감이 올라왔다.

어학실로 내려갔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회색으로 번진 흐린 풍경 사이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규창이었다. 여느 때처럼 말없이 다가오는 그 모습은 낯익고도 낯설었다. 그는 바짓단을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이상하게 든든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기억 속에 숨어 있었던 사람처럼, 그는 흐린 날의 풍경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교무실에서는 임시 휴교가 결정되었다. 선생님들은 분주히 전화를 돌리며 아이들 집에 연락하고 계셨고, 복도와 교실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다시 교실로 가서 가방을 챙기고, 천천히 학교를 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낮게 드리워 있었고, 구름은 울음을 머금은 듯 잔뜩 찌푸려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데, 교문 앞에서 또다시 규창이를 마주쳤다.

“집에 가니?”

“응.”

“너 혹시 우리 동네 가볼래?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 끝내준다. 너 플라타너스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랬다. 국어책에 김현승의 ‘플라타너스’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한번 실제로 보고 싶었다. 시를 쓸 만큼 매력적인 나무인지 정말 한번 보고 싶었다. 규창이의 말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초대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망설였다. 어찌해야 하나? 망설임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처럼.

“평소에는 버스 타고 가는데 지금은 안 다닐 것 같아. 우리 기차 타고 가자.”

그 순간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 기차라는 단어인지, 플라타너스인지, 규창이의 목소리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나를 움직였겠지. 그날의 선택은 이미 마음속 깊이 결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학교를 나섰다.


모래내 역에서 경의선 완행열차를 탔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기차를 타면 나의 어린 시절을 떠나 어른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 이후로 기차를 탈 때마다 나는 한 단계씩 성숙해져 있었다. 창밖 풍경은 여전히 회색빛이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규창이의 손이 내 손끝에 잠시 스치고, 나는 그 짧은 접촉 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 침묵 속에서 서로를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다.

두 정거장 가서 화전역에 내렸다. 화전역은 그야말로 시골 간이역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동네였다. 기찻길 옆에 호박꽃이 피어있고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곳이었다. 화전역에 도착하자, 우리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 걸어온 친구처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규창이는 국방대학원 사택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국방대학원 교수님이셨다.

“여기서 조금 걸어가면 우리 집이야.”

철길을 건너고 조금 걸어가니, 마침내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내가 그토록 상상만 했던 플라타너스들이 그곳에 있었다.

와! 쭉 벋어있는 곧은 나무 기둥. 머리숱 많은 청년처럼 잎이 무성했다. 게다가 자잘한 잎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별 모양 잎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의젓한 나무가 있었다니.... 사람이라면 안기고 싶었다. 김현승이 아니었다면 나라도 시를 썼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1연을 읊었고, 규창이는 이어서 2연을 읊었다. 시는 그렇게 우리 사이를 흐르는 공기처럼 가볍고 진하게 퍼져 나갔다.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플라타너스는 단지 나무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사람과 그 사람의 마음에 기대어 피어나는 시라는 것을.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keyword
이전 12화민희 이야기 5 - 코스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