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 이야기 7 - 자전거

by 서유정

아침에 하늘이 열린 것 같이 쏟아붓던 비는 그쳐 있었다. 구름 사이로 쨍한 햇빛이 보일 정도였다. 다른 곳은 비가 오는데 여기만 잠깐 멎은 것 같기도 하고 햇빛이 구름 사이로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는 것도 같았다. 국방대학원 아파트는 여느 아파트와 다를 것 없는 5층짜리 건물이었다. 허름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조용한 아파트. 다만 입구에 헌병이 서 있었다. 규창이 집은 5층이라 걸어서 올라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수요일마다 봉사활동 가셔서 아무도 없어. 큰 형은 군대 갔고 작은 형은 학교 갔어.”


마루 바로 옆에 미닫이 유리창으로 연결된 서재가 있었다. 서재 한쪽 벽면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장이 있고 하나 가득 책이 꽂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 많아서 그런지 남의 집인데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 공간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천천히 책장 앞을 걸었다. 책 냄새, 나무 서가의 질감, 그리고 조용한 공간. 모든 것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약처럼 느껴졌다.

“뭐 만들어줄까? 라면이랑 김치볶음밥 중에.”

“아니, 우리 그냥 도시락 먹자.”

학교가 임시휴교를 하는 바람에 아침에 싸 온 도시락이 그대로 있었다.

규창이와 마주 앉아 도시락을 나누는 순간이, 그렇게 특별한 줄은 몰랐다. 말없이 밥을 먹고, 말없이 창밖을 보았다.

그러다 규창이가 말했다.

“소나기라는 소설에서 소년이 소녀를 업어주잖아. 사실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왜 그런지 알겠더라. 너 지난번 자연사 박물관 갔다가 쓰러졌을 때, 얼굴이 정말 하얬거든. 또 쓰러지면 업고 갈려고 했는데 집이 어딘지 몰라서...”

“그날 밤에 박물관 뱀들이 내 꿈에 다 몰려와서 또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어휴.”

우리 둘 다 웃음이 나왔다. 밥을 다 먹고 식탁을 정리했다.


베란다 창문을 열어보더니 규창이가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날씨가 개이는 것 같은데 나가서 자전거 탈까? 너 자전거 탈 줄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탈 줄은 알지만 넘어지면 다칠까 봐 무서워서 타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자전거라도 타러 나가야 할 것 같았다. 1층에 있는 자전거 중 한 대를 끌고 국방대학원 운동장에 나갔다. 학교 운동장과는 비교도 안되게 넓었다. 학교 운동장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군대 연병장이었다. “나 사실 자전거 잘 못 타. 조금 타다 넘어져. 넘어질까 봐 겁도 나고.”

“괜찮아. 내가 잡아줄게.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잘 타게 될걸.”

운동장 둘레에 잔디로 된 스탠드 좌석이 있는 형태였다. 스탠드 좌석에서 올라타니 자전거에 처음 앉아서 출발하는 것이 잘 되었다. 규창이가 뒤에서 손으로 잡아줘서 나는 페달만 돌리면 되었다. 처음에는 균형 잡기가 어려웠다. 공중에서 줄을 타는 광대가 된 기분이었디. 넘어질락 말락, 가다 서다,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자전거가 타졌다.

“If I were a bird, I can fly to you.”

영어 시간에 죽어라 외운 가정법 과거 문장. 자전거를 혼자서 타니 정말 새가 된 기분이었다. 새처럼 자유로웠고, 바람이 뺨을 스쳤다. 힘들어서 잔디밭에 앉아 잠깐 쉬었다. 하늘은 어느새 쨍하고 맑아 있었다. 아침에 하늘에 가득했던 검은 구름은 하얀 뭉게구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규창이가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에 가보자고 했다. 규창이가 앞에 타고 내가 뒤에 탔다. 잡을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규창이 허리를 잡았다. 아까 내가 자전거를 탈 때는 넘어지지 않게 집중하느라 땀이 나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규창이 등 뒤에서 자전거를 타니 하늘이 보이고 시원하고 너무 좋았다. 공기가 내 뺨에 기분 좋은 속도로 닿고 있었다. 오전에 걸었던 플라타너스 길을 반대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게 되었다.

햇볕은 나뭇잎 사이로 살짝살짝 나를 쳐다보고 눈 부시지 않은 명암을 드리우고 있었다. 비 온 뒤라 젖은 나무 냄새, 초록의 내음이 가득한 상쾌한 공기였다. 비가 그친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매미들도 일제히 나와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맴맴맴맴, 쓰르르르~르. 맴맴맴맴, 쓰르르르~르.

다른 곳은 물난리가 나서 복구에 정신이 없을 텐데 지금 이 순간 플라타너스 아래는 늦여름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따뜻한 등, 흐르는 땀, 숨소리. 플라타너스 아래를 지나며, 매미 소리와 바람이 뒤섞인 풍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규창이 등에 얼굴을 기대었다. 편안하고 포근하기도 했지만 행복했다. 그동안은 느껴보지 못한 처음으로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맑은 빛으로, 깨끗한 공기로, 초록 나뭇잎과 물방울로, 매미와 우리들의 웃음소리로, 완벽한 시공간이 완성되고 있었다. 내 몸의 모든 세포가 하나하나 자유롭게 깨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도 같고,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같았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행복하고 싶어 하지만, 아니다. 한순간의 지극한 행복감으로 영원을 살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규창이가 플라타너스 길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집에 가서 가방을 가져온 후, 그는 나를 역까지 데려다주었다. 기차가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비는 그쳤고, 하늘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있었지만 조금씩 붉은빛을 머금고 저녁노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 아래 벤치에 잠시 앉아 있던 우리는, 더 할 말도 없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멀리서 아이들이 고무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비가 지나간 마을은 오히려 더 평화로워 보였다.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차가 들어오고, 나는 천천히 올라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규창이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여기 와줘서 고마워.”

기차가 출발했고,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모습은 작아졌지만, 마음속에서 그날의 장면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비, 바람, 젖은 교복, 기차, 플라타너스, 그리고 자전거. 그날 이후, 나는 가끔씩 문득 창문을 연다. 혹시 그날의 바람이 다시 불어올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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