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모가 계시고 딸내미가 있다. 내 마음에 있어 노모와 딸내미의 존재는 똑같다. 그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나에게 소중하고 가슴 뭉클한 사람이다. 늘 애틋하고 고마우며 측은함의 대상이다.
그러나 내가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대화법, 음성의 빛깔, 대화의 빈도, 위하는 행동이 모두 다르다. 사랑하는 마음이 같으면 대하는 것도 같아야 마땅하거늘 실제는 그렇지 못하니 이 어찌 개탄스럽지 않으랴.
딸내미와 대화를 할 때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냥한 목소리로 살갑게 하지만 노모와의 대화는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노모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다가도 똑같은 소리와 습관적인 넋두리에 이내 건성으로 듣거나 딴청을 피운다. 딸아이와의 대화는 재미있는 이야기건 고민이건 자연스럽게 빠져들지만 치매 증세가 있는 노모와의 대화는 자꾸 제자리를 맴돌아 따분하다. 반복해서 같은 말을 물어보거나 어쩌다 당치 않는 뻘소리를 하면 왈칵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하고 그런 밴댕이 소갈머리 내 태도에 내 자신도 못마땅해 속상해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엄마는 내게 늘 다정하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대하지만 난 그런 엄마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이 때로 귀찮다. 엄마는 자식 사랑이 유난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그게 좋으면서도 정말 싫다. 내가 내 새끼에게 주는 것은 늘 즐거움이고 보람인데, 엄마로부터 받는 건 언제부터인가 부담스럽고 거북스러워졌다.
가끔 처와 오순도순 여러 가지 얘기를 한다. 그 대화의 소재는 대부분 딸아이에 관한 것이다. 아이와의 갖가지 추억부터 그동안의 성장과정과 현재 상황, 앞으로의 미래 계획까지 얘기를 하다보면 한도 끝도 없고 재미있다. 가끔 그 대화에 엄마의 건강상태, 보살핌의 문제 등 엄마가 소재로 오르지만 그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 주 관심사는 딸내미에게 관한 것이고, 엄마는 부차적인 존재이다. 여기서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을 갖다 붙이면 왠지 민망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엄마는 나와 대화하기를 원하고 나는 딸내미와 대화하기를 원한다. 엄마는 내 인생 전반기에는 든든한 후원자고 중심이었지만 후반기에는 딸내미가 내 중심이 되었다.
나는 그런 나의 행위와 태도에 자책하며 엄마에게 잘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생각만큼 잘 안되고, 자식에게는 그냥 마음이 끌리므로 안 되는 것이 없다. 딸내미한테는 내가 비록 속상한 일이 있어도 짜증을 내면 안 될 거 같고, 엄마는 버럭 짜증을 내도 괜찮은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엄마는 그런 존재이다. 생각하면 눈물겹고 원통할 일이다.
그래서 돌아서 혼자 술잔 기울이면 후회가 밀물져오고 엄마의 생애와 그 측은함에 가슴 먹먹하여 비통하기 이를 데 없다.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머리를 쥐어뜯고 맹세하건만 그 맹세는 결코 오래가지 못함을 안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자주 하신다. 나는 또 똑같은 소리 하신다고 타박하며 무뚝뚝하게 통화를 마무리하곤 한다.
딸내미가 전화를 하면 무슨 일인가 싶어 만사를 제쳐두고 귀를 쫑긋 세우고, 혹시 있을지 모를 애로사항에 바짝 대비한다.
엄마는 늘 나를 바라보며 ‘조심해라, 사랑한다.’ 라고 말하지만, 나는 내 새끼를 바라보며 그 말을 그대로 전한다. 내가 진실로 상처받고 힘들 때 의지하고 나를 지탱해주는 이는 엄마이고, 나는 반대로 행여나 상처받을까봐 힘들까봐 살뜰히 예의주시하는 건 딸내미다.
싫은 소리를 해도 되는 사람, 그래서는 안 될 거 같은 사람.
한 사람은 웃음의 대상이고 한 사람은 한탄과 한숨의 대상이다.
세월은 쉬이 흘러가는데, 한숨의 시간은 태산같이 쌓여간다.
풍수지탄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꼬...
오늘 밤 나는 술을 또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