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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an 12. 2022

첫사랑

간밤에 그녀를 보았다

내가 좋아했던 여자

내 아내가 아닌 여자

매운바람 부는 여자


뜬금없이 내 꿈에 나타났다 그녀가,

이게 몇 년 만인가

내 나이 55살이니 30년도 넘은 세월이다

어쩌자구 나타난 것일까...

그녀는 어느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변함없이 깔깔거렸다

여전히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실패한 혁명가처럼 외로웠다

나는 꿈속에서도 이게 꿈이 아니길 바랬다

그리고 얼마 후 고적한 슬픔의 숲을 빠져나와 눈을 떴는데,

그제서야 그녀가 무척 그리웠다

비현실적인 아픔이 검은 골목에서 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창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또 많은 사람을 만나고 숱한 희로애락도 있었다

결혼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가난했다

무엇보다 그 망할 놈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삼아 뭔가를 끄적이며 창밖의 일과 창안의 일을 떠올려보곤 했다

아래 ‘그 사람’처럼....

그 사람, 

내 아내가 아닌 여자

별 수 없이 나는 두 여자랑 같이 살았다 


한 여자로부터 

버림받는 순간

나는 시인이 되었고


한 여자로부터

용납되는 순간

나는 남편이 되었다.(나태주 시인의 ‘두 여자’ 전문) 


간혹 술을 마시고 창밖을 내다보면 먹먹한 기억이 비를 맞고 있겠지만

앞으로도 나는 그게 행복인양 즐길 것이다

오래 전에 약속한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왔던 대로 보내주면 될 일이다

변함없이 

그녀의 웃음소리는 귓전에 쟁쟁하겠지만 말이다


-그 사람-

이름 모를 들꽃이 숱하게 피고지고 포르르 날던 산새가 

발자국에 화들짝 놀라 떠나버린 시간들 

긴 산그림자의 검은 침묵들

종이비행기 한가로이 하늘을 날던 오후의 오련함으로 

무던한 일상이 기지개를 켜던 

약속의 나날들

늘 혼자서 노래해야했던 가난한 이야기들

새벽녘에 벌떡 일어나보면 빈소주병같이 쌓이던 먹먹한 기억들

구름장이 중중히 내려앉은 창가에 시선을 걸쳐놓고

빛바랜 일기장을 펼치면, 아직도 한숨부터 나오는 사람

세월 앞에 우뚝 버티고 선 망각의 나무들 사이로

자오록이 번져오는 고적한 슬픔

비 쏟아지는 저녁나절 아, 서리꽃처럼 흐릿하게 아름다운 사람

내 영혼에 땀을 흠뻑 쏟게 만든 사람

다시 그 길을 되짚어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부당한 기억 

모두 되돌려주고 도망쳐오고 싶건만

그대, 어디서 나처럼 늙어가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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