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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향 Galadriel Nov 17. 2022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1년 남짓, 많이 사랑받고 많이 사랑했던 '브런치'를 떠나려 합니다. 진즉에 떠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이제사 커서를 움직여봅니다. 게으름 때문은 아닙니다.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가 많은 터라 차일피일 우체통 치우는 일을 미루고 있었던 거지요. 사라지지 않는 어깨 통증은 타이핑뿐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에도 각오가 필요하네요. 하여,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우체통을 치우려 합니다'라고 작별의 인사를 올리려 했지요. 


오늘 새벽입니다.  " 아뉘 작가님. 그동안 어디 계셨던 거예요? 몇 개월째 현기증 나고 있단 말입니다 "라고 소리치는 D작가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정확하게 일주일 전 11월 11일에는 " 오래 글이 올라오지 않아 몹시도 궁금하고 걱정됩니다." 라며 발신인 없는 메일이 날아왔습니다. 그 전날에는 세상에서 제일 뜨거운 한 줄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어 메일을 띄웁니다."라고 내 생에 가장 짧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알고보니 두번째로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셨죠.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내가 뭐라고 이리도 애틋하고 따뜻한 마음을 보내 주신 걸까요. 번지수가 틀린 건 아닐까요? 몇 번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골라 보내셨을 "그리움"으로 나는 감옥행을 면했습니다. 하마터면, 그리움을 유기한 죄 몫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을테니까요. 


혹, 이 편지를 읽고 계신 작가님께선 보셨는지요? 1995년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 를요.  산드라 블록과 빌 풀먼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살아가던 루시(산드라 블록)는 시카고 철도국 직원으로 토큰 판매일을 합니다. 운명의 크리스마스날, 불량배에게 떠밀려 철로에 떨어진 남자 피터를 구합니다. 평소 짝사랑하던 남자였죠. 병원으로 옮겨진 피터는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그 상황에서 간호사의 실수로 본의 아니게 약혼자 행세를 하게 된 루시는 피터 가족과 가까워지고 그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피터를 사랑했지만 그가 잠든 사이 피터의 동생 잭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와 결혼에 이른다는 진부한 스토리입니다. 잭(빌 풀먼)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누구나 짐작 가능한 뻔하디 뻔한 할리우드 영화지요. 그래도 재미있는.... 


독백으로 처리한 도입부에서 주인공 루시 역의 산드라 블록은 어린 시절 아빠에게 묻습니다. 언제 엄마를 진짜 사랑하는지 알았냐고요. 아빠는 엄마가 자신에게 빛나는 '세상'을 선물했을 때라고 대답합니다. 진짜 세상을 주고 싶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던 엄마의 센스가 빛을 발하던 지구본 모양의 램프였지요.  엄마는 아빠에게 주고 싶었던 '마음'을 램프에 담아 "세상"을 선물했습니다. 저는 작가님들께서 보내주신 '그리움'으로 '세상 따뜻한 세상'을 또 한 번 선물 받았습니다. 

 

K 작가님은 '소심하여 그립다는 말이 온당한지 모르나 그립다' 했습니다. 밴쿠버의 빨간 우체통은 그 자리에 잘 있는지, 주인장의 건강은 어떠한지, 염려와 행복의 기원을 바구니 가득 담아 보내셨습니다. 짧은 한 줄 속에 수많은 물음표와 사랑을 담아 보내신 L작가님의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습니다. 이렇게 뜨거운  두 장의 그리움을 받고서 잠이 오겠는지요. 나의 부재로 어지럼증을 앓고 계신다는 D작가님의 댓글을 읽고서 잠을 잘 수가 있겠는지요. "오늘도 좋은날이요" 라고 군데군데 기도같은 댓글을 달아주신 S작가님의 발자국을 보고 어찌 편히 잠들겠는지요. 도대체 잠 못 드는 새벽, 나도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을 일으켜 한 글자 한 글자 두드려 봅니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올리던 그날처럼 심장 위로난 선로에 쿵쾅쿵쾅 기차가 달려갑니다. 


같은 선로 위에 올라섰지만 누구는 달리고 누구는 정차 중이며 또 누구는 목적지를 몰라 방황하고 있을 테지요. 누군가 같이 가자고 이제 움직일 시간이라고 말해주며 서로의 독자로 서로의 치어리더이신 브런치 작가님들! 언제 돌아올지, 달아놓은 댓글을 보기나 한 건지... 불러도 대답 없는 무심한 사람을 기다려주시고 깨워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끔 안부와 격려를 보내주시는 두 분 S작가님과 "굿모닝 작가님"으로 괜히 서럽던 가을을 설레게 해 주셨던 H작가님....  자격도 없는 "성님"을 불러주신 밴쿠버의 C작가님, 얼른 나아 돌아오라 불러주신 D, T, C, L, K, Y, J작가님과 긴 글 읽어주셨던 여러 작가님들! 저도 많이 그리웠습니다. 


그리운 이름을 떠  떠올리자면 이 밤이 다 가도록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이제 다시 영화를 들여다보겠습니다. 간호사의 실수로 만들어진 관계이긴 하나 잭은 약혼자의 동생이었고 루시는 형의 약혼자였습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의 감정을 드러낼 수도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혹시, 피터가 깨어나던 밤 잭이 루시를 바래다줄 때 했던 루시의 대사가 생각나시는지요. 루시는 사랑하는 잭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닌 해야만 하는 말을 합니다. 관객들의 기대와 상상을 무시한 체 말입니다.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한 루시는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라면을 루시는 몰랐던지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말하죠.  잭에게 다가가는 자신의 마음을 멈추려고 한 가슴 시린 각오였을 겁니다. 나 역시 '떠나야겠다' 생각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게 된 이유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가 원하던 문장이 아니었던 거지요. 이렇게 돌아와 다시 작가님들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할 기쁨에 적잖이 떨리는 창밖에 바람이 부네요. 가을에 부는 훈풍...참 좋습니다.


가을훈풍은 다음에 또 나누기로 하고 영화이야기를 마저 해 볼게요. 가진 것 없는 루시는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생계에 밀려 그 어느 나라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이탈리아 플로렌스를 갈 거라는 꿈을 간직한 채 언제나 여권을 가지고 다니지요. 그녀처럼 나도 다시 우체국을 열거란 마음을 가지고 살았고, 우표 없는 편지를 뒷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피터와의 결혼식 도중 신부인 루시가 "이의 있습니다"라고 용기를 냅니다. 자신은 피터와 약혼한 사실이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피터가 아닌 잭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상한 대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가족의 이해와 도움 속에 잭과 결혼한 루시는 플로렌스로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또다시 루시의 독백이 흘러나옵니다."인생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도 난 잭을 얻었다" 라며 꿈꾸던 플로렌스도, 여권에 도장도 찍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특별할 것 없지만 따뜻한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처럼,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라 읽고 돌아서면 잊힐지라도 내 '글 생'의 끝도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2022년 가을이 끝나가던 어느 날이었어,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그녀가 허접하고 재미없는 얘기를 오래도록 썼지, 가끔 쓸만한 얘기도 있었어"라는 험담을 해준다면 나는 루시의 말을 빌어 독백할 겁니다. "내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계획대로 흐르지 않았기에 브런치를 만났고  브런치에서 만난 인연들로 내 삶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충분히 재미있었다." 라구요.


2022년 11월 16일 밴쿠버에서 박지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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