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딛고 넘는 벽
먼 하늘에 흰구름이 흘러간다. 시간이 흐르고, 나도 흐르고 너도 흐른다. 실개천이 강으로 흘러 들어가듯, 강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가듯, 서로 다른 강줄기를 타고 흘러 흘러 이곳 리타이어먼트 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일 년에도 몇십 분이나 된다. 내 이름 하나면 통과하지 못하는 문은 없었다는 높으신 분과, 내세울 이력도 자랑할 이름도 없지만 고개를 절로 숙이게 만드시는 분들이 함께 살겠다고 선택한 곳이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온 시간이 선물한 주름진 얼굴에, 굵어진 손마디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노년이다. 입주하실 땐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마지막 길동무들이기에 화려했던 왕년은 벗어던지고 지팡이 하나 짚고 들어오신다. 세월이 깎아 둥글고 넉넉한 마음이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챙기며 둥글둥글 지내신다. 그런 동무들도 삐걱 거리는 날이 있다. 팔 구십 년을 살아온 힘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나 보다.
저녁식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할머니 두 분이 언성을 높여 가며 잘잘못을 따지고 있었다. 메리와 도로시였다. 몇 분이 말리고 간호사가 달려왔다. 모르긴 해도 뾰족하신 메리 할머니가 가시를 꺼내 찌른 게 틀림없었다. 할머니는 자신만 모르는 공인 ‘트러블 메이커’로 반갑지 않은 별명이 붙어 모두가 은근히 거리를 두는 분이다. 평소에 큰소리는 커녕 말수도 적은 할머니 도로시가 울음을 터트리셨다. 그러자 메리 할머니는 더 큰 목소리를 꺼내 흔들며 승전고를 울리고 싶어 하셨다.
그때였다. 다이닝 룸을 가득 메우는 피아노 소리... 프랭크 할아버지께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하셨다. 드물게 연주하시는 캐논 변주곡이었다. 오른손 멜로디에 평소보다 많은 장식을 달아 빠르고 화려하게 연주하셨다. 어떠한 잡음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마구 두드리셨다. 그러자 순식간에 전쟁은 끝이 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프랭크 할아버지는 쇼팽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78세의 피아니스트다. 말년의 베토벤처럼 할아버지는 소리를 못 들으신다. 보청기를 했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 소리를 잃으면 언어구사 능력도 떨어지는지 할아버지는 꼭 필요한 말씀도 못 하실 때가 많아지셨다. 말씀도 안 하시고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시는 할아버지의 감정과 의사를 읽어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화가 필요할 때면 스무고개 하 듯 연거푸 질문을 해서 대답을 이끌어 내고 기분을 파악해야 한다. 대신 할아버지의 기분을 읽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할아버지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심신이 즐겁고 가벼운 날은 경쾌한 춤곡 “쇼팽 왈츠 6번” 일명 “강아지 왈츠”를, 심신이 괴롭고 우울한 날엔 더없이 슬픈 “녹턴 20번”으로 할 말을 다 하신다. 이 세상엔 쇼팽만이 존재한다는 듯 가장 좋아하시는 곡도 “쇼팽 발라드 1번 G 마이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연주 때마다 조금씩 분위기를 달리 하시는 이 곡은 영화 “The Pianist”속 슈필만 다음으로 할아버지가 최고다.
슈필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잔혹함 속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다. 영화 “The Pianist”에서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으로 분한 애드리안 브로디는 폐허가 된 건물 안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독일군 장교 호젠펠드가 보는 앞에서…. 이 한 곡의 연주가 끝나고 나면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기에 도입부에서의 흔들리는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더 몰입하게 만든다. 하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은 남자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날아다니며 피아니스트 로서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창으로 넘어오는 창백한 달빛을 받으며 혼신의 힘을 다 해 연주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숨 한번 쉬지 못하고 빠져 들었던 자신을 떠 올릴 것이다. 그때 연주한 곡이 바로 “쇼팽 발라드 1번 G 마이너”다. 온몸에 돋아난 솜털까지 모두 일어나던 전율을 오래도록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명곡이다.
할아버지 프랭크는 저녁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피아노 앞에 앉으신다. 거의 매일 연주하시고 언제나 짧은 것으로 한 곡만 들려주신다. 늘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연주 시간이 10분도 넘는 이 곡 “쇼팽의 발라드 1번”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행운이 자주 찾아 드니 듣는 우리는 그냥 고마울 따름이다. 치매가 시작된 할아버지는 단기 기억 상실증이 심해지고 있다. 10분 전에 주문한 식사 메뉴도 기억하지 못하신다. 방금 식사를 하고 가셨는데 하루 종일 굶었다며 되돌아오시기를 일주일에도 몇 번씩 반복하신다. 그 뿐 아니라 고운 은발머리를 단정히 빗고 다니시던 할아버지가 머리에 까치집을 짓는 날이 부쩍 더 많아지셨다. 사라져 가는 청력과 기억력도 문제지만 떨어진 체력 탓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피아노 연주는 문제가 없다. 단지 예전에 비해 속도가 조금 느려지고 힘이 떨어졌을 뿐 … 신기한 건 날이 갈수록 할아버지 연주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늘어 난다는 것이다.
낙엽이 지고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아무리 단단히 걸어 잠근 철벽 같은 가슴이라 할지라도 빗장을 풀고 야 만다. 이제 곧 무덤으로 갈 우리가 싸울 일이 뭐가 있으며, “이기고 지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 고 자문하게 하신다. 할아버지의 연주가 시작되면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구비구비 돌아온 인생길에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이 연민의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녹아들고 만다. 슈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연주할 때도 그랬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슈필만 앞엔 독일군도 전쟁도 존재치 않았다. 오직 서로에게 녹아든 연주자와 관객만 있을 뿐.
시인 정호승은 그의 시"수선화에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 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 마을로 내려온다고. 시인의 말처럼 우리들의 삶은 노년으로 옮겨 갈수록 살아가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란걸 온 몸으로 읽는다. 모두가 외로운 섬이다. 오래전 아내를 먼저 보내시고 누구보다 외로운 할아버지는 머리에 까치집을 이고서도 피아노 연주를 하신다. 하루에 한 번 한 곡의 연주로 섬과 섬을 연결하신다. 잡다한 말 대신 한 곡의 쇼팽으로 세상의 소음을 잠재우시는 할아버지는 백 년의 내공으로도 건너지 못하는 강물 위에 다리를 놓으시는, 78세의 아름다운 현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