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by 늘보

나는 지각대장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뛰면 1분, 걸어서 3분 거리의 학교에

매번 지각했다.

오히려 학교가 가까운 것이

지각하는 이유가 되었다.

뛰면 1분이면 가는데

미리 준비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계산한 대로 정확히 딱 맞춰

출발하면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변수는 존재했고

나의 완벽한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가기 일쑤였다.


쉽게 고쳐진다면 습관이 아니다.

지각하는 습관은 학교가 멀어진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도 여전했다.

엄마의 잔소리에도 내 계산대로

최대한 뭉그적 대다가

시간에 딱 맞춰서 나갔다.

그러면 보란 듯이

그날따라 버스가 늦게 왔고

그날따라 신호에 계속 걸렸다.

그리고 딱 5분씩 늦었다.

교문에서 걸릴까 봐

개구멍으로 들락거리고

그러다 걸려 더 호되게 혼나기도 했다.

겨우 5분 때문에 혼나는 게 억울했다.


세 살 버릇 스물다섯까지 간 채

직장에 들어갔다.

여전히 자주 지각했고

여전히 딱 5분씩 늦었다.


지각한 날은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였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놈의 지각 때문에

잘한 일까지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느 오전

중요한 회의가 있던 날,

그날따라 지하철이 늦게 왔고

그날따라 사람이 많아 차를 한 대 놓쳤다.

뛰다가 환승역 계단에서 굴렀고

그럼에도 숨이 턱까지 차게 뛰었다.

그리고 역시 나는 또 지각했다.

많이도 아니고 딱 5분.

엉망진창의 모습으로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다 제시간에 와서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넘어지고 뛰어왔건만

딱 나 혼자만 지각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한 사람은 없었지만

왠지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눈빛들이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자리에 앉았지만

회의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죄인처럼

상사와 동료들 눈치를 봤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자처해서 했다.

아침에 지각한 것 때문에

사람이 비굴해지는 것 같았다.

겨우 5분인데

고작 5분 때문에...


너무 화가 났다.

정말로 화가 났다.

지하철이 늦게 와서

사람이 많아한 대를 놓쳐서

계단에서 굴러서

죽도록 뛰어서 왔는데도

사람들이 날 그렇게 쳐다봐서

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그렇게 되도록

함부로 대한

나 자신에게

미친 듯이 화가 났다.


하루를 망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겨우 5분을 지각하는 것이다.

5분 먼저 도착했다면

하루 종일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들의 한심한 눈총을 받을 일도 없다.


5분 지각과 5분 먼저 오는 것 사이의 시간은

억만 겁의 세월도 아닌

딱 십 분이었다.

십분 먼저 나왔다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고

허둥대다 계단에서 구르지 않았으며

토할 만큼 뛰지 않아도 됐다.

커피 한잔 타서

여유롭게 회의에 들어가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스스로의 가치를 자체 삭감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날, 기적처럼

25년간의 지각인생이 끝이 났다.

하루 종일 죄인처럼 지낼 생각을 하니

아침에 절로 눈이 떠졌다.

내가 계산한 시간보다

늘 십 분 먼저 출발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아침에 여유롭게 커피도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앉아서 인사하는 맛이

정말 근사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어깨 펴고 일할 수 있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예상 도착 시간보다 일찍 출발한다.

직장에 늦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모임이든

거의 가장 먼저 도착해 있는다.

내가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리면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늦는다.


그들은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첫인사를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하고

사과의 뜻으로

커피를 사기도 한다.


그 마음 내가 잘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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