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군자 제(第) 삼락(三樂)

나는 맹자의 제삼락(第三樂)을 모른다

by 인해 한광일

문자 쓰기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서 한참 웃었지만, 마지막엔 그 때문에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그는 내게도 선생 오래 했으니, 마땅히 군자삼락 중 세 번째 낙은 한 번쯤 있지 않겠느냐 물었다. 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삼락야(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 ). 내가 고개를 젓자 오히려 그가 당황스러웠는지 날 위로했다. 그까짓 게 맹자의 낙이지 우리들의 낙이겠냐고.


맹자의 군자 삼락론 중 세 번째, 영재를 만나 가르치는 즐거움. 이 비슷한 말만 나오면 나는, 오래된 일이지만, 여지없이 오문영이 떠오르곤 했다. 벌써 십오륙 년 전의 일이었다.


퇴근하고 집에서 아내와 함께 차 한잔을 나누며 책을 읽고 있던 때였다. 전화가 울렸고, 아내가 내게 넘겨주었다. 오문영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갈피를 끼워 둔 책을 다시 집어 들었으나, 오문영의 말이 귀속에 너무도 쟁쟁하여 책을 덮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빈 찻잔 대신 아내에게 물 한 컵을 받아 들었으나, 물보다는 맥주 한 잔이 더 생각났다. 당시 별로 놀랄 일이 없던 아내의 눈이 동그랬다.


오문영 그 아이. 그 아이가 혼자서 아기를 낳았다는 소리에 가슴이 먹먹했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다가 그 아이는 왜 머리핀이 생각났을까? 그 아이가 중학교 시절 아버지를 여읜 이야기.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세상살이를 나온 이야기. 한 삼 년 전 어머니를 마저 잃은 이야기. 이제 스물한 살이고 제천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자꾸만 맥주잔을 끌어당기게 한다. 난 그 아이에게 제대로 선생 노릇한 기억이 없는데, 그 아인 왜 내가 기억났을까? 거듭 잔을 들었다.


편애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은 선생이 되기 전부터였지만, 그걸 마음으로 다진 것은 것은 선생이 된 지 5년째 되는 시점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안양에서 막 근무를 시작할 때였다. 그땐 애들이 더 많았다. 30명을 훨씬 넘는 아이들 중에, 수업시간에 나와 눈 맞춰 가며 또렷하게 공부하는 아이는 몇 되지 않았다. 반 아이들이 열명뿐이던 지난해 교실을 생각하면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하루 종일 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하교하기도 하였다. 급히 선배를 만났고, 선배를 만나서야 그게 진짜 고민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 오는 내내 그 일만 생각했고 결국 다음날 출근길에 학교 앞 문방구에 들러 플라스틱 공깃돌을 몇 줌 샀다.


가정이 유복하면 대체로 아이들의 학교 생활도 유복한 편이었다. 표정이 밝고 차림새도 말끔할 뿐만 아니라 발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수업시간을 주도하는 편이었다. 친구도 많고, 곧잘 내게 말뿐 아니라 농이나 장난도 걸어올 줄 알았다. 그런 아이들은 잘 가꾸어진 꽃송이처럼 보기 좋았다. 가정이 불우한 아이들은 대부분 이와 상반된 행동을 보인다. 표정이 어둡고 손을 잘 들지 못하며, 시험 성적도 신통치 못하다. 더러는 차림새가 남루하기까지 하다. 친구의 생일에 잘 초대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 통하는 친구도 많지 않다. 나를 좀 어렵게 여기기도 했다. 그늘에 숨어 자라는 야생화만 같았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도 공깃돌은 종종 내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곤 했다. 안산으로 근무처를 옮긴 뒤에도 그랬다. 아이들과 다 같이 지내려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어찌 보시든 나는 종종 청바지를 입곤 한다. 쉬는 시간에 교실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내가 앉으니 아이들도 따라 앉았다. 그렇지만 따라 앉은 아이들은 붙임성 있는 그 아이들이었다. 붙임성 있는 아이들 때문에 공기놀이가 금방 유행되었다. 덕분에 나도 아이들도 손톱 밑에 마룻바닥 가시에 찔려 몇 번쯤 고생하곤 했다. 그렇다고 그만 둘 공기놀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수업시간에 나랑 눈빛을 맞출 줄 모르는 아이는 의자에서 교실 바닥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아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이는 손목에 힘을 주어 끌려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교실 바닥에 앉았다. 늘 내 곁에 모여들었던 아이들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다시 모여들었다. 아이와 나는 한 편이었다. 공기놀이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는 놀이에서 금방 죽었다. 아이들이 아이로부터 공깃돌을 넘겨받았다. 그것은 아마도 아이와 아이들의 최초의 교류였을 것이다. 하교 시간에 아이에게 공깃돌 다섯 알을 주고, 너는 나와 한편이니 집에서 많이 연습해 보라고 했다. 아이의 공기놀이 솜씨가 금방금방 신통해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나아져 갔다. 며칠이 지나서 점심시간에 교무실에 볼 일이 있단 핑계로, 내가 교실바닥에서 철수를 했다. 종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교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아이가 아이들 틈에 끼어 있는 것을 보았다.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따로 보아주고 시험을 보아도, 수학도 국어도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가 또 혼자일 경우 나는 아이 손목을 교실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더러 성격 좋은 진영이가 부르면 아이도 쭈뼛거리며 아이들 틈으로 들어서기도 했다. 아이들과 섞여 있을 때 보니 아이는 머리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다고 6학년 여자 아이의 마음에 함부로 물수제비를 띄울 수는 없었다. 아내에게 부탁하여 너무 요란하지 않은 꽃을 달고 있는 머리핀을 하나 넘겨받았다. 아무도 몰래 아이 손에 머리핀을 놓아주었다. 아이는 다음날 머리핀을 꽂지 않았다. 차림새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이의 집안 사정은 좋지 않았다. 아이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학부모로부터 간경화증을 앓고 있는 아이의 젊은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어머니가 일용직 일을 나서야 하는 사정을 들었다. 6학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였으리라 아이의 머리에 머리핀이 꽂혔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마저도 겨우 기억해 낸 머리핀이었다. 머리핀을 꽂고 아이는 어색해선지 자꾸만 고개를 주억거리곤 했다. 그러다가 졸업을 맞이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아이들 몇몇이 사진을 함께 찍자며 교실로 몰려왔지만,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맹자의 군자 제 삼락, 영재를 만나서 가르치는 즐거움. 맹자의 인생관에 동의하는 동료나 선배들은 그래서 그런지 제자로부터 온 전화나 편지를 무척이나 기뻐하곤 했다. 사실 우리 같은 분필 가루받이들에게 제자가 사회에 멋지게 진출했다는 소식보다 좋은 소식은 없을 것이다. 그들 선배나 동료들은 밭이 좋으니, 그 밭에 뿌리를 내린 아이들이 능히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더러, 인생 제 삼락을 제대로 누리며 행복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좋은 밭이 아니었는지 별로 그런 소식을 듣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척박한 내 밭에 거름을 넣는 일뿐으로, 처음 전화를 받았던 그 시간에도 학생 상담에 관한 연수를 받던 중이었다. 그렇지, 그 전화도 오문영의 전화였댔다. 그러나 연수 중이었으므로 바꿔 주기 곤란하다 하니까, 오문영 쪽에서 나중에 전화를 다시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끊었다고 했다. 저녁에 다시 전화를 받을 때까지 나는 오문영의 전화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문영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막 9시 뉴스를 시작하려는 때였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어눌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떨어졌고, 그 목소리는 8년 전 교실 장면을 확 펼쳐 놓고, 그중 4 분단 구석자리의 덩치 큰 여자 아이를 비추어 냈다. 시댁이라고 했다. 그 오문영이 결혼도 못하고 아기를 낳았단다. 아기를 낳곤 누군가에게 간절히 전화를 걸고 싶었단다. 친정아버지도 친정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안 계셨지만, 아기를 낳았다고 누군가에겐 소식을 전하고 싶었단다. 어찌하다 보니 내가 생각났고, 교육청에 간절하게 내 전화번호를 물었고, 마침내 찾아냈단다. 오문영인 어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목소리는 어눌했다. 한 2년쯤 후면 결혼식을 올리기로 마음먹고 있는데, 그때 초대하면 와 주겠느냔다.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그때 뭘 입고 가느냐니까 2년 후의 입을 걸 벌써 걱정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못난 선생이 되어서 그런가 그때 나는 영재를 길러내지 못하고도 왜 이리 마음이 뜨거운지 몰랐다.


이후로도 내 교편 경력은 십여 년을 더해가고 있음에도 내가 맡은 반에서 영재가 스스로 자랐으면 자랐지, 결코 내 힘으론 길러낸 기억은 없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 영재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반사적으로 오문영이 가슴 저리다. 아직도 난 맹자의 군자 제 삼락, 영재를 만나 가르치는 기쁨을 잘 알지 못한다.






수정과



설 명절 늦은 밤

휴가 나온다는 아들

목 빠지게 기다려

아껴 두었던 수정과에

몇 낱 잣을 띄워주셨던 어머니


지난여름

아버지를 어머니 곁에 모시는 일이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아무도 없는 아버지의 집은

내 가슴처럼

이 겨울 텅 비었을 것입니다.


오늘 밤엔

어머니의 수정과 그릇처럼

검고 차갑고 매캐한 하늘에

별들이 잣 알맹이처럼

흩뿌려져 떠 있습니다.


어머니,

오래된 영정 사진 속에서나마

늘 웃어주시는 어머니,

오늘 밤은 몹시도

오래전 그 겨울밤의

살얼음 낀 수정과를

이가 시리도록 마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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