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 미안

광복절에 부쳐

by 인해 한광일

한 5년쯤 묵은 이야기지만 그냥 지워버리기엔 미안해서 다시 되살린다. 2018년의 일이다.




그대들 미안

TV를 껐지만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가볍게 켠 TV였지만, 커피를 내려 마셔도 마음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학교는 3월 2일부터 시작인 까닭에 개학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2월 말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지만 오늘은 3.1절이고, 학교 시작 전 여유로운 마음으로 달게 쉬고 싶었다. 차 한 잔 준비하여 오랜만에 TV 앞에 앉은 참이다. TV 모 프로그램이 그간의 방송물을 편집하여,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 중이었다. 처음엔 별생각 없는 휴식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차를 다 식히고 말았다.



#1

그들은 한인 2세이거나 3, 4세들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시골이거나, 쿠바의 시골 한인촌 주민들이다. 그들의 조상들은 최악의 노예적 삶에 내몰린 인생을 살아냈거나, 황무지에 버려진 고난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십시일반 조국의 독립자금을 모았다니…. 아리랑을 부르며 조국의 독립을 기원했고, 그 노래를 기억하는 늙은 후손들이 아리랑을 물려받아 부르는 장면에선 가슴이 뜨거워졌다. 안타깝게도 그 후손들은 가난까지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얼굴은 고생으로 깊이 주름졌으며, 그들의 가옥과 그들의 기타는 낡았다. 그런 그들이 한국이란 이름만 들어도 행복하게 웃음 짓고, 자긍심을 느끼며, 여전히 조국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광복절을 명절로 지낸다니, 그저 노는 날의 하나로 전락하는 걸 막지 못한 우리의 광복절이 미안하고 미안하고 미안하기만 하다. 꼭 한번 조상의 나라에 오고 싶다고도 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인 그들의 모습이 초라한 것은, 단지 우리의 손이 닿기에 너무 먼 그들이기 때문일까? 그럼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유복하게 살고 있는가? 멀리 있는 그들의 차림새도 증거이지 싶다. 분명 그들도 누군가의 한탄처럼, 우리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제대로 대우하고 있지 않다는 또 다른 증거일 것이다.


#2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걸까? 경제적으로, 일부 문화적으로 번영 일로에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들의 이웃들이 한국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된 현실을, 그것이 자부심이 말하니 듣는 시청자로서 오히려 미안하다. 그러나 잘 산다는 게 그것뿐이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고, 정이 흐르는 사람이 많은 나라. 못난 어른이 아이들을 버리고, 못된 자식들이 존속 상해를 입히는 뉴스가 없는 나라여야 하지 않을까? 강요, 강제하지 않고 누구에게 해를 입었다는 Me Too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인격 존중의 나라여야 하지 않을까? 그들에게 보여 줄 우리의 모습이 정말 사람 살기 좋은 나라여야 하지 않을까?



#3

TV를 껐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웃음, 타국에서도 여전히 자신들을 한국인이라고 믿고 사는 3, 4세들. 한국이 자랑스럽다는 그들, 그들에게 왠지 미안하기만 하다. 그들이 초대되면 좋겠다. 그들이 그리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그런 나라로 초대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을 초대하기 전에 얼른 대한민국이라는 묵은 살림의 집안 대청소를 하자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밥짓는 소리




휴대폰 알람이 아니라

달그락달그락

그릇 소리에 잠을 깼다.


누운 채

일어나지 않고

그릇 씻는 소리를 들었다


가스렌지에선

무언가 소리 죽여가며 끓고 있다


누님은 어제

나 온단 소릴 듣고

어시장에라도 다녀왔나 보았다


그놈이 그놈 일

우럭이며 삼치같은 생선들 중

눈이 제일 맑은 놈으로

두어 마리 꿰어 왔을 테지


알찬 양파채와

푸른 미나리도

한 냄비에서 끓고 있나보다


어릴 적 한뼘 쯤 차이나던 키 차이가

지금은 거꾸로 되어 있지만

이 나이 먹도록 나는

마음 씀씀이 차이 만큼은

조금도 줄이지 못했나 보다


시간이 느즈막하건만

누나는 여전히 소리를 죽이며

누이 노릇이다


새벽을 조심조심

씻고 또 씻어

접시에 무엇인가 담아내는

맑은 소리


살림이 나만도 못한 누나에게

호사스런 아침상을 받으려나 보다


오십년 넘어서야

뒹굴뒹굴 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맑은 유리 구슬 하나가

또르르 굴러 든다


ㅡ상아, 아침 먹자


그제야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소리를 향해 걸어 나간다


ㅡ그래,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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