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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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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Jan 29. 2024

가야 태자 월광기

1화. 아기의 탄생


  검은 구름이 또다시 무서운 번개에 찢어지고 곧이어 세상을 깨뜨릴 듯한 우렛소리가 대가야의 도읍지 상가라도의 밤하늘에 포효하였다.

 “항아전에선 어찌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이냐?”

  이뇌왕은 옥좌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항아전은 가야궁 뒤편 왕후의 처소였다. 문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당도하였다.

  “난산이옵니다, 폐하. 아직 소식이….”

  내우외환으로 시달리느라 비록 바람 잘 날 없는 왕궁이나 가락 형제들의 어른 왕이니 어의는 감히 왕을 폐하라 일컫고 있다. 이뇌왕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러니 어의가 있는 것이지. 일이 잘못되면 네놈의 목은 온전치 못하리라.”

  방금 당도했건만 어의는 다시 근심 가득한 낯빛으로 허리를 굽혔다가 급히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어의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는 이뇌왕의 얼굴에도 수심이 깊었다. 왕은 몸을 돌이켜 옥좌에 올랐다.

 ‘낳아야 한다. 대가야와 신라의 아기이다. 꼭 왕자를 낳아야 한다.’ 

  마음이 간절해질수록 자꾸만 불길한 생각도 뒤꼭지에 진득하니 달라붙어 이뇌왕은 오른손에 턱을 괸 채 머리를 흔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싶어 눈을 들어보니 비가 그쳐 있었다. 대전 밖으로 나서니 하늘엔 검은 구름이 깨어진 유빙(流氷)처럼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고, 가야궁 처마를 스쳐 가는 소슬바람이 대숲을 흔들어 빗물을 떨구어 내곤 했다. 오늘이 보름이었던가. 흩어진 구름 사이로 환한 달빛이 새어 나오려 할 때였다. 어지러운 발소리들이 항아전 쪽에서 다시 급히 대전으로 몰려들었다.

  “폐하,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아기씨가 탄생하셨습니다. 왕자 아기씨가 탄생하셨습니다.”

  급보를 받은 이뇌왕의 얼굴이 불을 켠 듯 환한 웃음으로 밝아졌다. 

  “참말이렷다, 왕자를 낳았으렷다?”

  “그렇습니다. 왕후마마께옵서 건강한 왕자 아기씨를 낳으셨습니다.”

   묻는 이뇌왕도 대답하는 어의도 감격에 겨운 목소리였다.

  “그래, 왕후는? 왕후는 어떠하시냐?”

  “참으로 어려운 고난을 잘 이겨내셨습니다. 폐하, 거듭 경하드립니다.”

  “그래그래, 고맙구나. 내 너에게 후사하리라. 당장 항아전으로….”

  “폐하, 왕후마마께옵서는 기진하시어….”

  말을 가로막는 어의의 말을 이뇌왕은 얼른 알아들었다. 

  “내일이 좋겠다, 그 말이렷다?”

  이뇌왕은 옥좌에 앉으며 아쉬워하였으나 얼굴의 웃음기는 그대로였다.

  ‘이로써 혼인동맹은 완성된 셈인가?’

  이뇌왕은 진심으로 기뻤다. 

  “그래, 어의에게 후한 상급이 있을 것이다. 밖에 일러 주안상을 들이라. 이 기

   쁜 날 어찌 주안상이 없을 것이냐?”

   어느새 하늘엔 먹구름이 모두 흩어지고 밤하늘이 맑았다. 둥근 달이 잔잔히 떠서 가야궁 지붕을 눈부시게 밝히고 있었다. 대전 아래 용부연(龍浮淵)에도 달이 맑았다. 한밤중의 축하연으로 가야궁이 한동안 떠들썩했지만, 시간이 늦어지자 이뇌왕은 대신들을 돌려보냈다. 그렇지만 젊은 학자 양승과 양승 또래의 장수 아량이 아직 왕의 곁에 남아 있었다.     



  “달지! 달지가 어떻겠습니까? 달처럼 밝은 님 말입니다.”

   양승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구슬이라도 찾아낸 것처럼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오, 아기의 이름이렷다? 좋구려. 아량은 어찌 생각하오, 달지란 이름을?”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왕자님이 장성하시면 저 둥근 달처럼 밝은 덕을 온 가야누리에 비추실 것만 같습니다.”

  청년 장수 아량이 기쁜 표정으로 양승과 이뇌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뇌왕 역시 양승과 아량을 번갈아 보며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었다. 두 사람의 전적인 찬동을 받은 양승은 더욱 기뻤다. 

  “양승, 아량. 내 잔을 받으시오. 그대들 덕분에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썩 훌륭한 이름을 얻었소. 참으로 고맙소.”

  날이 새도록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대전 뜨락에 굴렀다.     



    월광 태자의 그늘진 얼굴을 애처로이 바라보는 양승의 얼굴 위로는 반대로 새하얀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내 아호(兒號) 달지 이야기에 이젠 아주 귀가 닳겠소.” 

  “태자님의 아호를 신라에서는 도솔지라 칭한답니다.”

  “그 또한….”  

    양승은 월광의 제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월광이란 존명은 서라벌의 법흥 임금님께서 부처님 전생의 이름에서 따오신 귀하디귀한 이름이라 했지만, 사실 월광은, 아호 달지에 다름 아닌 듯싶습니다.”

  그러나 월광은 머리를 저었다.

  “나는 내 이름 월광이 싫소. 이름이 그리 밝으니 궁궐 어디에도 나는 숨을 곳이 없는 게 아니오.”

  “태자마마….”

  아량이 월광을 위로하고자 했으나 월광은 아량의 부름에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

다. 월광 태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월광 태자 즉 달지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대가야 

상가라도와 신라 서라벌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달지 왕자는 대

가야의 아들이자 신라의 손주가 아닌가. 가야궁 사람들은 모두 아기 왕자 달지바라기였다.

  달지 왕자가 태어난 지 삼 년이 지난날. 서라벌의 법흥왕이 아기에게 월광이란 이름을 함에 담아 비단 보자기에 싸서 보내왔다. 그로부터 아기 왕자 달지는 월광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달지 왕자가 태어난 뒤 대가야는 전에 없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급격히 가까워지는 대가야와 신라의 관계에 백제는 위협을 느꼈다. 대가야의 턱을 부술 듯하던 백제가 병력을 웅진으로 회군하여 간 뒤  다시는 대가야를 침공하지 않았다. 이뇌왕은 신라에 꾸준히 선린의 사신 보냈다. 신라도 대가야에 답방에 소홀하지 않았다. 달지 왕자 나이 세 살. 이번엔 가야궁에 월화 공주가 태어났다. 신라의 왕녀에게서 왕자와 공주가 태어났으니, 사람들은 이제 대가야와 신라의 동맹이 영원할 것이라 믿기 시작했다. 이뇌왕은 법흥왕이 비단 보자기에 싸서 보낸 새 이름 월광으로 왕자의 이름을 고치고, 그 이름으로 세 살에 불과한 아기 왕자를 태자에 책봉하였다. 이로부터 아기 왕자 달지는, 아니 월광은 불과 나이 셋에 대가야의 태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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