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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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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02.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4화 가야금 십이곡

 

  어느덧 월광이 열 서넛 나이가 되었을 즈음, 가야누리의 번왕(藩王)들은 이뇌왕이 위기를 딛고 금관가야의 부강을 다시 이루어냈다며, 입이 마르게 칭송했다. 번왕들의 칭송을 연해 듣자, 이뇌왕의 가슴 속에는 묻어두었던 꿈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이제 가야 누리의 온 힘을 가야성 상가라도로 모으리라. 조각조각 나뉜 가야누리가 아니라 이제 하나의 가야를 이루리라 꿈을 꾸었다. 이뇌왕 십육 년은 그예 쇠락할 대로 쇠락한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재기를 포기하고 아들 셋을 이끌고 법흥왕에게 항복하던 때였다. 끝까지 금관을 믿었던 가야누리의 번왕들은 금관국 구형왕의 항복에 절망하였지만, 이뇌왕은 오히려 어금니를 물었다. 대가야는 이제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맏이 자리를 이어받아 가야누리를 지켜야 하는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이뇌왕은 우선 조각조각 찢진 가야 연맹을 하나의 가야로 꿰매고자 하였다. 누구보다도 먼저 우륵이 떠올랐다. 선대(先代) 가실왕의 총애를 받던 우륵이었다. 우륵의 가야금 십이 곡을 번왕들에게 다시금 들려주고 싶었다. 초야에 묻혀 지내던 우륵이 이뇌왕의 부름에 즉시 가야성으로 들었다. 선왕 가실왕을 모셨던 우륵이 늙은 눈으로 이뇌왕을 감격스럽게 바라보았다. 가실 임금의 장례 때 가야궁을 나서며 마직막으로 보았던 청년 이뇌가 이리도 당당히 가야성의 주군이 되어 있지 않은가. 이뇌왕은 우륵의 빠른 당도가 놀랍기도 기쁘기도 그지없었다. 우륵이 당도하자마자 가야 십이 번(蕃)에 연통을 넣었다. 대가야의 도읍 상가라도에서 십이 번국의 회합을 이루어보고자 하니, 번왕들 모두 모두 보름 후에 상가라도로 와달라는 통문이었다. 하지만 이뇌왕의 통문에 번왕들은 시큰둥했다. 금관을 대신해 달라며 대가야를 칭송하던 그들은 막상 이뇌왕의 부름을 받자, 이젠 지금의 대가야의 힘은 대가야가 업고 있는 신라의 힘이 그 실체일 뿐이라며 고까워했다. 가실왕 대에 이르러 옛 금관만큼이나 강성해진 대가야를 맏이로 인정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대가야의 힘이라고 믿고 있진 않았다. 그들은 모두 가실왕이 승하하자마자 석 달이 안 되었을 때, 무령왕의 침공으로 단번에 위기에 빠져들었던 이뇌왕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번왕들은 입으론 대가야를 칭송했지만 속으론 각자도생(各自圖生), 그것뿐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번듯하게 자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혹 강한 적이 침입해 온다면, 그것이 곧 번의 마지막 운명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야의 번들은 모두 무력한 운명론자들이었다. 사실 가야의 번들을 제각각 놓고 보면, 아라가야를 제외하곤 지방의 수령(守令)정도의 세(勢)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이뇌왕은 부아가 났다. 이뇌왕은 지난 십사 오 년의 세월이 헛된 세월이 아니었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였다. 세월이 그만큼 지나는 동안 대가야에는 인재가 그만큼 늘었고, 백성들 또한 그만큼 늘었다. 산물이 그만큼 늘었고,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왜로 철기를 공급하였으며, 위기에 대비하여 병력을 늘렸다. 물론 이런 것들 중엔 금관의 것도 적지 않았다. 패전 후 금관이 서라벌에 시달리고 있을 때, 금관의 적지 않은 싸울아비들이 대가야로 스며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뇌왕은 이번 회합을 기회로 어떻게든 선왕 가실 임금의 뜻을 실현시키는 전기(轉機)를 마련하리라 마음먹었다.    

 

  선왕의 가야금 십이 곡의 뜻을 이뇌왕은 이젠 알 것 같았다. 가야금 십이 곡이야말로 선왕께서 온 가야누리를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꿈이 아니었을까? 이뇌왕은 무엇보다도 먼저 선왕의 뜻을 번들에게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보름 후 상가라도 회합에 모인 것은 여덟의 번(藩)들 뿐이었다. 공무가 바빠 올 수 없을 거라던 번들은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이뇌왕은 그들이 몹시 괘씸했다. 그래도 회합연을 멈출 순 없었다. 

     

  “내 생전에 상가라도에서 다시 회합연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소?”

  “가야금 십이 곡은 어떻고요. 오늘 우륵이 다시 가야금 십이 곡을 연주한다지 않소?”

  “우륵이 말이오? 그가 여기 가야성의 상가라도에 있소?”

  그들만으로도 회합은 떠들썩했지만 이뇌왕의 표정은 어두웠다. 회합연이 무르익고 몇 순배 술잔이 돌자, 그래도 모임 자리에 조금씩 흥이 일었다. 그래도 이뇌왕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즈음 가야금 소리가 맑게 울리기 시작하자, 점차 좌중이 가야금 소리를 위해 잔잔해졌다. 이윽고 소(沼)에 담긴 물처럼 사위가 고요해지자 가야금 소리가 더욱 청아하게 울렸다. 한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탄성(歎聲)을 내뱉으며 우륵을 칭찬했다. 

  “진정 우륵이로군.”

  우륵이 좌중에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가 곧 자세를 고친 후 다시 가야금에 손을 얹었다. 악공들이 우륵을 따랐다. 가야금 십이 곡이었다. 가야금 십이 곡은 연주법이 독특했다. 열두 번이나 변주했다. 변주 때마다 새로운 무희들이 나와 곡을 타고 춤을 추는 공연이었다. 가야금 십이 곡은 사실, 열두 가야, 즉 번 각각의 곡이 연주될 때마다 번왕(藩王)들이 자국에서 함께 데려온 무희와 노래꾼을 무대에 올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회합곡이었다. 그런 방식은 가실왕 때 정해진 의례였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의 가야금 십이 곡 중 네 곡은 무희도 노래꾼도 없이 우륵과 그의 제자들의 가야금 연주뿐 이었다. 금관가야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으니 본시부터 가야금 십이 곡은 지금에 와선 과만한 곡이었다. 그러나 다른 무대마저 빈 무대로 공허하자 이뇌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런 이뇌왕의 심중과 달리 번왕들 중에는 오로지 우륵의 가야금 연주에만 심취하여 눈마저 감은 자도 있었다.


  “번왕들께선 오늘 이 자리가 그리도 기쁘시오?”

  갑자기 이뇌왕이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서며, 술병을 내던졌다. 우륵이 연주를 멈추었다. 찬물을 맞은 듯 회합연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가야누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단 말이오, 하나. 하나의 가야 말이오. 이렇게는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소.”

  이뇌왕의 목에 핏줄이 섰다. 

  “오늘 이 자리엔 특별히, 신라국의 삼맥종 왕자께서도 오셨거늘 번왕이란 자들이 핑계를 대며 회합자리에도 

  오지 않다니 이것이 무슨 실례오이까? 금관이야 그렇다 쳐도 번 셋이나 말입니다.”

  이뇌왕이 격한 감정을 솟구치며 곁에 섰던 장수의 칼을 뽑아 들었다. 좌중이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이뇌왕이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악공들을 향해 나아갔다. 흰 수염의 우륵이 눈을 질끈 감고 앉아있었다. 이뇌왕이 눈 감은 우륵의 앞에 멈춰 서서 걸음을 칼을 높이 들자,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고, 악공들이 가야금 위로 엎드렸다. 우륵은 여전히 꼿꼿이 앉은 채 흰 수염을 날리며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차르릉'

  이뇌왕이 내리친 것은 우륵의 가야금이었다. 좌중이 모두 공포에 질렸으나 가장 놀란 사람은 이제 막 열다섯이 되는 태자 월광이었다. 언제나 월광에게는 자애롭기만 했던 이뇌왕이었다. 부왕의 이런 분노를 처음 겪는 월광이었다. 월광은 너무 놀라 숨조차 쉬기 힘들어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런 중에도 태산 같은 인물이 하나 있었다. 오직 서라벌 사절이라는, 약관의 신라 왕자 삼맥종 만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과 우륵의 꼿꼿한 모습은 소란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이뇌왕의 눈에도 삼맥종이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삼맥종에게서 멈췄다. 삼맥종도 꼿꼿이 앉은 채로 이뇌왕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였지만 당찬 눈빛의 삼맥종이었다. 범접하기 힘든 눈빛이었다. 

  “멀리 서라벌에서 오셨는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상국의 왕자님께 사죄하오.”

  이뇌왕은 칼을 옆으로 집어 던지곤 회합장을 휘적휘적 빠져나갔다. 장수 아량이 이뇌왕의 뒤를 급히 따르자, 그의 부장 둘도 서둘러 아량의 뒤를 따랐다. 아수라장 속에서 삼맥종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삼맥종은 여전히 눈을 감고 꼿꼿이 앉아있는 우륵에게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장께 가야금이란 무엇이오?”

  우륵이 눈을 떴다. 삼맥종을 보고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여쭈소서.”

  삼맥종이 빙긋 웃었다.

  “이미 물었소. 가야금이란 무엇이오?”

  삼맥종의 젊은 눈빛이 제법 진지했다. 우륵이 입을 열었다.

  “저의 가야금은 선대 가실 임금님께서 소망하시어 오동나무를 길들여 만든 악기입니다. 하늘의 악기이며, 땅의 악기입니다. 천문을 담아 만들라는 명을 받자와 현 열둘을 걸었지요. 현은 모두 한 줄 한 줄이 각각 열두 가야를 뜻하나이다. 곧 현 열두 줄이 오동나무 하나에 걸린 것은 열두 가야는 곧 하나의 가야라는 뜻이지요. 소인의 가야금은 비록 진의 쟁을 본받아 만들었으나 고금에 없는 현금(弦琴)이라 자부하나이다. 가야의 금(琴)이니 곧 가야금입니다. 지난 날 가실 임금님은 가야금을 어루만지시며, 내 그대에게 가야금을 만들게 한 것은 가야금 열두 줄의 음률로써 십이 가야에 호소하고, 온 가야누리 백성들의 고달픔을 위로하며, 백성들의 뜻을 임금과 같이 하나로 모으고자 함이라 하셨지요. 가야금은 그러한 악기이옵니다.”

  삼맥종이 우륵을 오랫동안 그윽이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훌륭한 악기이오만, 오늘 그대의 가야금은 가야누리를 하나로 만들지 못했구려.”

  우륵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훗날 인연이 된다면 나를 찾아오시오. 나는 신라의 왕자 삼맥종이오.”

  우륵이 급히 일어서서 삼맥종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삼맥종이 잔잔한 웃음으로 우륵의 예를 받고는 몸을 돌이켰다.

  “그대가 월광 태자시군요.”

  삼맥종은 이번엔 아직도 회합연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황망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월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월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삼맥종이 월광을 잔잔한 미소로 잠시 더 바라보다가 주위에 이뇌왕의 향방을 물었다.   

  

  삼맥종이 왕에게 물었다.

  “대왕께선 세 가라를 정령 정벌하여 치죄(治罪)코자 하십니까?”

  신라 왕자 삼맥종은 가야를 가라로 바꾸어 부르고 있었다. 이뇌왕이 삼맥종의 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다 우리가 그대의 신라국에 강한 우방이 되고자 함이오. 왕자께선 염려하실 일이 아니라 도리어 두둔해야 할 일입니다.”

  삼맥종이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본시 가라는 한 형제이니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오만, 무릇 따름은 선정과 존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디 선정을 베푸시길 바라겠습니다.”

  “소녀 아령도 신라의 젊은 왕자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다 여깁니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한 여인이 높은 목소리를 앞세우며 대전에 들었다.

  “금관이야 이미 사라졌으니 그렇고, 상기물, 보기, 거열 등은 소국 중의 소국이니, 대왕의 힘을 무시하여 일부러 거스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필시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니, 그 사정을 들어보고 합당하면 선처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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