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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Jan 31. 2024

가야 태자 월광기

3화. 혼인으로 물리친 적

    

  이뇌왕은 서둘렀다. 법흥왕과의 국혼 약속이 맺어지자마자 먼저 소식을 가야성이 아닌 백제군과 대치 중인 가북성(伽北城)으로 전했다. 가북성에선 즉시 국혼 기가 올랐다. 가야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뇌왕은 아량에게 급히 수십기의 깃발을 앞세우게 하여 왕성 수비대를 이끌고 또한 가북성으로 진군하게 했다. 가북성은 백제군의 수차례 공격으로 군기가 부러지고 성 이곳저곳이 많이 부서져 있어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가북성은 가야성으로 들어오는 최후의 보루였다. 백제군은 가북성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으며, 모인 부대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던 중이었다. 아량은 도착하자마자 가북성 성루에 신라의 깃발과 대가야의 깃발을 나란히 꽂았다. 그중 가장 큰 혼인기를 더욱 높이 달아 성루에 휘날렸다. 이어 병사들에게 활과 창 대신 징과 꽹과리를 들고 깨어지도록 울리게 했다. 징과 꽹과리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환호성이 가북성에서 치솟았다. 백제군의 진영에서도 신국 양화공주 대환영(新國 兩花公主 大歡迎)’, ‘국왕폐하 국혼경하(國王陛下 國婚慶賀)’라 쓴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또렷이 보였다.


  “신라군이 온다는 거야? 신라군이 동맹이라고?”

  아량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다. 마침 당도한 고구려 왕의 국혼 축하 글귀를 흰 천에 굵은 붓글씨로 옮겨 쓴 뒤 새로 깃대에 높이 달았다. 웅성거리던 백제 진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침공을 준비하던 백제군이 행동을 멈춘 것이다. 기세가 드높던 백제군 진영이 웬일인지 종일 그림인 듯 조용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백제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뇌왕이 다시 기지를 발휘했다. 가야성에 수습된 병력에 이번엔 서라벌의 군복을 입혀 가북성으로 보냈다. 신라군을 본 백제군에 긴장이 어렸다.  그즈음 무령왕의 귀에 또 다른 첩보가 날아들었다. 신부 마차를 호위한 신라의 대병력이 다시 대가야 망산벌을 건너온다는 것이었다. 신라와 대가야 동맹군과의 전투는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무령왕은 군사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웅진으로 돌아간 후 다시는 대가야 땅을 밟지 않았다. 이뇌왕의 치세 십칠 년 동안 대가야와 신라 사이에는 화평이 유지되었다. 대가야의 평화는 곧 가야 번국(蕃國)들의 평화로 이어졌다. 전쟁을 잊게 되자 대가야 뿐만 아니라, 온 가야누리의 백성들이 한 입으로 이뇌왕과 왕후를 칭송했다. 어떤 이들은 지금의 대가야를 옛 금관가야 취휘왕 대의 빛나던 치세와 비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뇌왕의 가슴은 남모르는 자괴감에 괴로웠다. 서른 후반의 이뇌왕은 아직 젊었다. 서라벌과의 혼인동맹은 결과적으로 대가야에 십 칠년 가까이 평화를 가져왔으나, 그 동안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의 반격으로 피폐해진 금관가야는 마침내 그 영토가 완전히 신라에 복속되고 말았던 것이다. 신라의 동맹인 이뇌왕은 형제의 나라가 사라지는 것을 그냥 모르는 체, 등을 돌리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취희왕 시절, 금관가야는 너무도 성급했다. 철갑을 두른 말에 철기병으로 무장하고 날카로운 병장기를 갖추었더라도 작은 나라에게는, 군대보다도 외교와 동맹이 더 중요했음을 간과했다. 옆에서 오래도록 경쟁해오던 신라를 압도하자 젊은 취휘왕은 신라를 취하고자 하는 데까지 야망을 키웠다. 바다 건너 몇몇 왜의 소국들까지 금관 종속을 자처했고, 금관이 이들을 용병으로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자, 넘치는 힘을 한번 써보고 싶었나 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신라가 기대고 있는 고구려를 등한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신라 정벌에 나서기 전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는 외교가 있었어야 했다. 금관가야는 알지 못했다, 신라가 의탁하고 있는 고구려가 얼마나 강대한 나라인지를. 고구려에 당해보고 나서야 고구려의 상상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알았지만 이미 처절하게 패한 뒤였다. 고구려의 병사들은 금관가야의 용병 부대인 왜군들은 물론 같은 철기병마 부대인 금관가야의 군병들조차 거센 기세로 궤멸시켜버리고 말았다. 고구려는 자신들의 제후(諸侯)를 자처하는 신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금관가야를 혹독하게 다루었다. 금관가야의 철기병들을 땅끝까지 몰아붙여 철저히 패퇴시킨 후, 병장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야철장과 그릇을 생산하는 토기막마저 철저히 파괴하였다. 고구려의 개마기병대는 금관가야의 재기불능 상태를 확인한 뒤에야 무서운 그림자를 거두어 간 것이다.     

  신라 정벌에 실패하고 도리어 고구려의 거센 침공를 받은 금관가야는 날로 쇠락에 쇠락을 거듭했다. 질지 임금 때도 겸지 임금 때의 노력으로도 금관가야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감지왕 대에도, 구형왕 대에 이르러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면 신라는 멸망의 위기를 딛고 날로 새롭고 또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서라벌 왕실은 은밀한 명을 내려 짓밟힌 금관가야 땅에서 삶의 터를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한 금관가야의 철기장들과 토기장들을, 그들의 가족까지 모두 거두어들였다. 그로부터 철기장들은 금관가야의 창칼 대신 신라의 강철 무기를 제련하기 시작하였고, 토기장들은 서라벌에 없던 토기를 굽기 시작했다. 신라의 창칼은 더욱더 날카로워졌으며, 서라벌의 물산은 날이 갈수록 풍요로워졌다. 거기에 신라의 왕실과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금관가야에 멸망지경을 극복한 뒤로 강한 이웃 나라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소지마립간에 이어 지증왕도 힘을 다해 군대를 길렀다. 선대왕들의 절치부심을 지나 마침내 법흥왕 대에 이른 서라벌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법흥왕은 더욱 내실을 다져 나갔다. 특히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이차돈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고구려나 백제에서 섬기는 불가(佛家)의 효용도 눈여겨보고 있었다.      

  백제의 무령왕은 대가야를 침공함으로써 고구려에게 잃은 한수 이북의 땅을 대신하여 동쪽 대가야 쪽으로 기운을 뻗어 백제의 중흥을 꾀하고자 했다. 뜻이 거의 이루어질 무렵 대가야의 이뇌왕이 갑자기 신라의 왕녀와 혼인동맹을 선언함으로써 일이 어그러지게 되자 크게 낙심하였다. 개로왕 때의 피폐를 이겨내고 힘이 축적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백제의 힘만으로 두 나라를 한꺼번에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대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 소식을 듣자마자 서라벌에 축하 사절까지 파견했다지 않는가. 하는 수 없이 무령왕은 대가야에서 군사를 거두어야만 했다. 무령왕은 고심 끝에 눈을 밖으로 돌렸다. 바다 건너에는 금관가야를 잃고 표류하고 있는 왜의 소국들이 적지 않았다. 왜인들은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자신들에게 철제 무기며 농기구를 대어 줄 대체자를 찾고 있었다. 금관가야 대신 아라가야를 드나들었지만 아라가야만으론 그들이 필요한 물량을 얻는 데 턱없이 부족했다. 무령왕은 기꺼이 왜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백제는 이미 이들이 아니더라도 왜의 땅에 닦아 놓은 인연들이 있었으나 이들과도 새롭게 연을 맺고 부지런히 교통했다. 왜는 새로 열린 백제를 부지런히 드나들며, 철제 농기구와 무기 등속을 들임은 물론 금관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서책과 불경까지 열심히 들여갔다. 왜를 본격적으로 경영함으로써 백제에도 점차 힘이 쌓여갔다.   

   

  신라의 왕녀를 왕후로 맞아들인 대가야 역시 짧지 않은 평화 시기를 누리며 어느 정도 힘을 축적할 수 있었다. 흥성해지는 대가야를 보며 가야의 제국(諸國)들은 고무되었다. 그들은 모두 형제들이었으나 이전에는 금관가야를 맹주로 믿고 스스로는 금관의 번(蕃)을 자처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금관가야에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 가야제국(諸國)들은 스러져가는 금관가야 대신 대가야에게 의탁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대가야가 금관가야를 대신해주기를 바랐다. 모두들 대가야의 번(蕃)이 될 수 있다 했다. 이쯤 되자 이뇌왕은 스스로 자신을 가야의 맹주로 자처했다. 이뇌왕은 작은 가야 형제들을 번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뇌왕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가야도 꿈꾸지 않았던 ‘하나의 가야’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연맹은 금관가야가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에 패배한 이후 지독히도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고구려가 쓸고 간 금관가야는 존망의 위기가 연속되었다. 원한에 사무친 신라군이 금관의 새로운 임금 질지왕 대에도 시시때때로 금관가야를 들이쳤다. 금관의 잔존 병력의 첩보를 들이밀며 금관뿐만 아니라 여타의 가야누리까지 말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감지왕 대엔 그때까지 몰래 숨겨 기르던 금관의 철기병대가 발각되어 금관가야는 신라의 대규모 침공을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금관은 정말로 완전히 힘을 잃었다. 금관의 철기장(鐵器匠)들에 의해 더 날카로워진 신라의 창칼에 의해 금관이 무너지는 중이었다. 이제 금관가야에는 궁궐의 도둑이나 막을 수비병 외의 군대가 허락되지 않았다. 금관가야는 구형왕대에 이르러선 사실상 신라에 예속된 형편 지경이 되고 말았다. 비탄에 빠진 구형왕은 대가야의 가실왕에게 자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밀서를 보내곤 했었다. 구형왕대에 신라는 금관의 땅을 제 땅처럼 무시로 드나들며 싸울아비들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며 온 나라를 휘젓고 다녔다. 이를 핑계로 이웃한 작은 가야누리 땅들마저 제멋대로 넘나들기 일쑤였다. 그런 와중에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착실히 내실을 다져냈다. 대가야의 가실왕과 아라가야의 여령왕은 서라벌의 힘의 범위가 그쯤이었던 것을 천행으로 여겼다.  둘 중에서도 대가야의 약진은 특히 두드러졌다.      


  신라가 금관가야를 괴롭히는 동안 백제도 가야의 소국들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백제에 국경을 잇댄 소국들은 별 이상한 핑계를 들으며 백제의 침공을 당하곤 했다. 연맹은 모두 대가야에 눈길을 보냈다. 아닌 게 아니라 백제는 어느새 성장한 대가야를 겨누고 있었다. 급서한 가실왕의 뒤를 이어 이뇌왕이 옥좌에 오른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결국 대가야는 무령왕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대가야는 가야 소국들의 피해를 안타까이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음에도, 대가야가 그들을 지원했다는 터무니없는 핑계였다. 대가야는 가야누리에서 드물게 칠천의 병력을 갖춘 나라라곤 하나, 온힘을 다해도 백제는 대가야로선 중과부적이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판세였다. 이뇌왕은 급히 신라에 군사를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미리 눈치챈 백제로 인해 사신은 서라벌에 닿지 못했다. 금관가야의 패배 이후 새로운 의지(依持)의 대상이었던 대가야가 환란을 당하자 온 가야누리는 온통 긴장한 눈으로 대가야를 주시할 뿐, 대가야를 지원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들 힘이 되기엔 너무나 미약할 따름이라 마음이 먼저 자괴(自壞)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뇌왕의 귀에 기막힌 정보가 들려왔다. 여동생 아령 공주의 심복으로부터였다.      


  “법흥제가 국경 망산 가까이에 당도하였습니다.”

  이런 걸 두고 천우신조라 하는 것일까. 이뇌왕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먼저 말을 달렸다. 법흥을 만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는 말 위에서 생각하기로 했다. 아령 공주의 심복이라는 미루가 이뇌왕을 앞서 말을 달리며 이끌었다. 이뇌왕의 뒤는 양승이 커다란 조롱을 옆구리에 낀 채, 부지런히 박차를 가하며 따랐다. 수십여 호위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양승의 뒤를 따랐다.

  ‘그래, 혼인이다. 법흥에게 혼인을 청하리라.’

  이뇌왕이 뒤의 양승을 향해 소리쳤다.

  “서라벌에 미혼의 왕녀가 있느냐?”

  양승이 더욱 박차를 가해 이뇌왕의 곁으로 다가와 대답했다.

  “법흥제의 직계는 아니나 소지마립간 소생의 양화 공주가 아직 미혼인 줄 아옵니다.”

  “그래, 되었다.”

  “예?”

   양승이 되물었으나 이뇌왕은 말의 박차를 가해 미루의 뒤를 더욱 바짝 좇을 뿐이었다. 

  ‘오직 혼인을 약조 받아야 백제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반드시 법흥의 허락을 받아 내리라.’


  이뇌왕은 입을 굳게 다물고 법흥왕이 와 있다는 국경 망산벌로 망산벌로 말을 달렸다.     

  이뇌왕은 지금도 문득문득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양화 공주가 미혼이었던 것이 천운이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양화 공주와의 혼인만으로 대가야를 구해낼 수 있을 줄은 이뇌왕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처럼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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