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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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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04.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5화. 아령공주와 월광


  이뇌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바다 건너 왜의 일이나 신경 쓰거라. 그들은 본시부터 분수를 모르고 오만했느니라. 가야누리의 일은 대가야의 주인인 나의 일이다.”

  “왜의 일이라니요?” 

  삼맥종이 아령 공주를 바라보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본시 가야의 백성들은 흔히 바다 건너 왜의 땅에 건너가 삶을 일구고 있으니 어찌 그들을 모른체 하겠소?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입니다.” 

  이뇌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삼맥종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래요, 오라버니. 가야누리 일은 오라버니께서 알아서 하시구려. 하지만 이번엔 소제(小弟)의 일도 한 번쯤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소제의 일엔 도리어 아라 의 임금님께서 원군(元君) 같습니다. 원, 오라버니는 오로지 가야누리, 가야누리. 이번에는 소제의 배에 토기와 철제 농기구, 그리고 고리자루 칼과 쇠도끼…,  곡식 종자도 좀 넉넉히 내어주시고요.”

   아령공주의 힐난이 듣기 싫은지 이뇌왕이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럽다, 지금 이 자리가 어인 자리라고.”

  “그런 건 전 상관없고 내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말씀 중인데 서라벌 왕자님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오라버니 보는 게 하늘의 별 따기 라서요.”

  아령은 삼맥종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몸을 돌이켜 대전을 나섰다. 아령 공주는 왜의 땅에 가야 마을을 건설하는 것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고 있었다. 월광의 고모인 아령 공주는 겨우 서른 중반의 나이였으나, 이뇌왕후 즉 양화공주는 언제나 월광에게 아령 공주는 거친 바다를 무시로 넘나들고, 아무 때나 맘대로 왜를 오가는 여걸이라 치세우곤 했다. 월광은 어린 눈으로도 씩씩한 아령 공주의 모습이 왠지 좋았다. 아령 공주도 월광을 유난히 귀여워하였다. 가야누리 회합연이 엉망진창으로 끝나고 삼맥종 왕자도 서라벌로 돌아간 뒤, 월광은 모후로부터 신라의 삼맥종 왕자가 그의 멀지 않은 외당숙 벌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묘해졌다.    

 

  “고모님, 바람이 무척 거세군요. 저 거친 물결, 솔직히 무섭습니다.” 

  대가야를 쫓기듯 탈출한 것도 모자라 이번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왜의 땅이라니…. 월광은 이제 열여덟이나 되었지만 바다를 본 것도, 바다를 건너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거센 바람과 검은 파도가 당장이라도 배를 뒤집을 것만 같았다.

  “태자님, 마음 굳게 먹어야 합니다. 이깟 파도쯤 못 이긴대서야 장차 어찌 대가야의 지존이 되시려고요?”

  궁궐에선 그렇게도 다정했던 고모였건만 바다를 건너는 동안 아령 공주는 월광에게 야멸차게 대했다. 아령 공주가 이끄는 선단은 커다란 돛배 일곱 척이었다. 배에는 가야의 물건들과 가야 사람들이 그득했다. 아령 공주는 그들을 개척민이라 일컬었다. 돛배는 동남풍을 받으며 순항했지만 파도는 거칠었다. 결국 월광은 뱃전에 엎드려 서너 번씩이나 고통스러운 멀미 끝에 뱃전에 눕고 말았다. 멀미를 거듭하고 나니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간 듯하여 무력감과 어지러움 증세에 괴로웠다. 그러나 공주 아령은 그런 월광을 본체만체하였다. 아령 공주는 월광을 등지고 해풍을 향해 마주 섰다. 공주의 옷자락이 거칠게 나부꼈다. 이레쯤 걸렸을까? 드디어 배의 왼편 멀찍이 뭍인지 섬인지가 고슴도치만 하게 나타났다. 배가 닿자, 어디인지 모를 곳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몰려들어 만세를 연호했다. 옷차림으로 보아 왜인들과 가야인들이 뒤섞여 있는 진풍경이었다. 대가야에서도 장사를 하는 왜인이야 더러 볼 수 있었으나 가야누리의 어느 장마당에서도 왜인들이 거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던 적은 없었다. 월광은 왜인들의 간소한 복색에 익숙했다. 그들 앞으로 어디서 나타났는지 가야의 군복 차림을 한 군병들 이십여 명이 일자진으로 늘어섰다. 돛을 내린 배에서는 먼저 가야누리에서 함께 배를 타고 온 개척민들이 희망에 들뜬 표정으로 봇짐 등짐을 이고 지고 내렸다. 이윽고 아령 공주와 월광이 차례로 배에서 뭍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령 공주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누군가의 함성이 터졌다.

  “아령 공주님 만세.”

  그 소리를 신호로 부둣가에 모인 사람들이 다 함께 한목소리로 만세를 연호했다. 그 만세 소리를 뚫고 건장한 사내 하나가 아령 공주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아령 공주가 밝은 표정으로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어 치하했다. 힘줄 도드라진 공주의 손은 결코 곱다고 할 수 없었다. 공주가 그에게 영을 내렸다.     

  “현령께선 이 물건들을 옮겨주시지요. 이 물건들은 새로 귀화하는 왜인들에게 나눠 줄 물건이요. 이틀 뒤에 현청으로 갈 터이니 귀화 왜인들을 모아주시오.” 

  ‘귀화’라니, 이곳은 왜의 땅이 아닌가? 그보다 왜의 땅에 가야의 현령은 또 무엇인가?’

  월광은 아령 공주가 왜의 땅에서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월광은 왜의 땅이 넓은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또한 아령 공주와 함께 지나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들이 가야 출신이거나 왜인이거나, 달려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이곳이 과연 왜의 땅인지 의구스러울 만큼 비현실적었다. 왜의 땅에 지어진 집은 가야의 집이었으며, 왜의 땅에 건설된 마을은 흡사 대가야의 마을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곳 사람들도 야철장을 짓고 쇳물을 녹여 연장을 만들었으며, 새 토기막에서 흙을 빚어 토기를 굽고 있었다. 고리칼, 쇠도끼, 보습, 도리깨…, 다만 왜인들과 가야인들이 한마을에 뒤섞여 지내는 모습이 낯설다면 낯설었다. 하지만 그들도 가야의 그릇을 쓰고, 가야인들의 집처럼 토벽을 바르고, 풀을 엮어 지붕에 얹은 가야식 초막에서 지내고 있었다. 백여 호가 넘는 마을이 서른 곳이 넘는다는 말에 월광은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다섯 마을에 하나씩 현청을 세워 가야식의 현령과 수하 관리들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생기 왕성했다. 실은 가야의 번(藩)도 이 정도로 자리를 잘 잡은 번은 드물었다.      


  아령 공주는 월광을 데리고 아소가라 현청으로 향하는 말 위에서 왜에 건설하고 있는 가야 고을 사업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하였다. 왜의 가야 고을엔 대가야의 이주민들은 물론 아라가야인들과 왜인들까지도 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라 했다. 심지어 백제인과 신라인들도 몇몇 들어와 있다 하였다. 멀리 벌판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월광의 궁금증을 읽은 듯, 아령 공주는 자애롭게 웃으며 새로 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불모지를 정리하는 것이라 했다. 아령 공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월광을 바라보았다. 왜의 땅 위에 건설된 모든 가야 마을은 모두 저런 불모지 위에 고난을 감내하며 세워 낸 것이라 했다. 월광은 대단하다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령 공주가 다시 또 월광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이제 이곳 사람들을 볼 땐 얼굴이 아니라 손을 먼저 보아야 한다 일렀다. 그 말 때문인지 그때부터 월광은 사람들의 투박하고 두꺼운 손에 자꾸만 먼저 눈이 갔다. 손들이 하나같이 크고 두터웠다. 상처 난 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들의 얼굴에선 미소가 깃들어 있지 않은가. 저리 힘든 삶을 살면서도 이곳 사람들은 어찌 저리도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것일까? 아령 공주는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였다.

  ‘저들은 아마도 처음 가지게 되어 저리 신명이 나는 걸 거요.’ 

  월광은 거듭거듭 아령 공주가 새롭게 보였다. 이따금 상가라도에서 뵙던 아령 공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며 둘이 같은 인물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월광과 아령 공주의 말이 나란히 아소가라 현청에 다다르자, 수십의 병사들이 바쁜 걸음으로 가야의 비늘 갑옷을 입고 걸을 때마다 쇳소리를 쩔걱거리며 현청 앞에 늠름하게 늘어섰다. 그런 갑옷은 대가야라도 흔한 것이 아니었다. 공주와 월광이 말에서 내리자 땅에 거꾸로 세워 들고 있던 창을 일제히 앞으로 불쑥 내밀며 가야식의 군례를 갖추었다. 현청 마당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현령이 달려와 공주와 월광의 말고삐를 잡았다. 말고삐를 넘겨준 공주가 느린 걸음으로 현청의 중앙에 마련된 단 위에 우뚝 올라섰다. 그리고 좌중을 천천히 자애로이 둘러보자 현민(峴民)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아소가라 현민들이 공주님을 뵈옵니다.”

  공주가 입을 열었다.

  “오늘 예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대가야의 태자님이오. 이 땅이 마침내 대가야의 월광 태자님을 맞이하게 되었소. 모두들 태자님께 예를 올리시오.”

  공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소가라 현령이 먼저 달려와 월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소가라의 현령이 본국의 태자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현청 안의 병사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현령을 따라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태자님을 뵙습니다.”

  월광은 가슴이 뛰었다. 본국에서 폐위된 처지에, 왜의 마을에서 다시 태자로 불리니 마음이 울컥하여 눈물을 쏟을 지경이었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울분이 솟구치는가 하면 수치감이 일었다. 이들에게 칼을 들어 인사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월광의 귓전에 다시 아령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아령 공주는 단에서 내려와 월광의 곁에 서 있었다.

  “태자는 지금 손에 태자 검을 들고 있소이다. 그것을 가진 자만이 진정한 대가야의 태자입니다. 단 위에 오르시어 어서 칼을 뽑아 저들에게 화답하시오.” 

  그랬다. 월광은 지금 손에 태자 검을 들고 있다. 태자 검이 있는 이상 월광은 스스로 태자임을 믿기로 했다.

  ‘반드시 대가야를 다시 찾으리라.’ 

  월광은 비로소 가만히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힘주어 단 위로 올랐다. 아령 공주처럼 단 위에서 현민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서 힘주어 스르릉 칼을 뽑아 들었다. 검광이 햇빛을 받아치며 번쩍거렸다. 월광이 검을 번쩍 치켜들자 아소가라 현청이 온통 환호로 뒤덮였다.

  “월광 태자님 만세.”

  “아령 공주님 만세.”

  “대가야 만세.”

  “아소가라 만세.”     


  아라가야로 돌아오는 뱃전에서 아령 공주가 물었다. 

  “왜의 땅에서 태자는 무엇을 보았소?”

  월광은 한참 동안 해풍을 얼굴에 맞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고모님을 보았나이다. 이주(移住) 가야인들을 보았나이다. 왜인들을 보았나이다. 그리고 가야를 보았나이다.”

  공주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령 공주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 배는 아라가야로 들 것이오. 이번에 아라가야로 돌아가면 기회를 보아 왕후님의 뜻대로 서라벌로 가시오. 가서 뜻을 펴시오. 그리고 반드시 대가야로 돌아가서 옥좌에 오르시오.”

  월광은 아령 공주의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신도 모르게 저절로 깊이 고개가 숙어졌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가만히 아령 공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월광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령 공주는 월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문득 아령 공주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 거친 바다를 두려움 없이 오가는 대가야의 공주, 왜에 새로운 가야를 짓고 있는 이분은 대체 누구인가. 그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돛배는 올 때보다 가벼운 몸체로 순풍을 탔다. 간소한 먹을 것과 물을 빼면 배도 거의 빈 배였다. 뱃전에서 월광도 아령 공주처럼 오래도록 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상념을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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