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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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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05.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6화. 교활한 법흥왕


  아무리 생각해도 변복(變服)사건은 법흥왕의 억지였다. 대가야의 상국 지위라며 신라의 시종들을 함부로 대가야의 번에 파견, 배치하는 것도 예가 아니거니와 파견국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졌어야 했다. 탁순에 봉사하겠다던 신라의 시종들은 무례했다. 탁순의 아리사등 왕이 내려준 관복을 하국(下國)의 옷이라며 뜰아래 벗어던지고 신라의 관복으로 궐내를 횡행했다잖는가. 탁순(㖨淳國)의 신하들과 여인들을 업신여겨 손찌검을 하고 희롱하며 희희낙락했다잖는가. 무례를 따지던 사내를 함부로 베었다잖은가. 그들을 추방한 아리사왕의 처사는 당연하지 않은가. 법흥왕은 어찌하여 탁순을 벌주리라 대노한 것일까? 저들은 어찌하여 오랑캐와 같은 망동을 하였을까? 그 또한 법흥왕의 계교였을까? 열여섯 나이의 월광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감히 손바닥 크기도 안 되는 가야의 번(蕃)이 짐의 신하를 능멸하다니!”

  법흥왕은 자신의 시종을 탁순의 사신으로 보낸 하대(下待)를 돌이켜 봄은 고사하고, 시종들의 탁순에서의 불손은 덮어둔 채, 그저 탁순의 조치에 분통만 터뜨렸다. 


  탁순국의 신라 사신, 아니 시종 추방 사건은 대가야와 신라 사이의 선명한 균열의 시점이었다. 이뇌왕이 가야 누리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가야의 번들을 상가라도로 불러들여 회합연을 열었던 때로부터, 그러니까 이뇌왕이 회합에 불참한 번들로 인해 화를 누르지 못하고 우륵의 거문고를 끊은 지 겨우 일 년 뒤의 일이었다. 삼맥종이 번영한 상가라도를 두루 돌아보고 서라벌로 돌아간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이뇌왕이 탁순의 아리사등왕에게 상가라도 회합연에 참석하지 않은 까닭을 묻고자 병사 오백을 이끌고 방문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뇌왕은 갑자기 변심한 듯한 일련의 법흥왕의 행동에 고민이 깊어만 갔다. 

  ‘탁순국의 일은 탁순을 번으로 거느리고 있는 대가야의 일이건만, 법흥왕이 어찌하여 대가야의 번에 시종들을 파견하는가? 저들은 또 어찌 탁순에서 그같은 망평된 행동을 하고 기괴한 일을 벌였을까? 또 법흥왕은 어찌 나 이뇌에게 아무런 통고도 없이 탁순을 직접 치죄하겠다 호언하는가?’


  어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가라도 회합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법흥왕이 묻고자 함임가? 대가야의 번을 신라가 왜? 대가야가 신라의 번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뇌는 법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금관가야를 차지하고 나서 안으로 쌓인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 대가야마저 병탄하여 백제와 직접 맞서고 싶은 것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이뇌왕은 갑자기 모골이 송연했다. 

  ‘안 된다. 아직은 아니다.’

 이뇌왕은 법흥왕과의 정면대결 만은 피하고 싶었다. 가야는 아직 하나가 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홀로 신라에 맞설 만한 힘이 못 되었다. 대가야가 다진 내실은 신라가 이룬 강성함에 비할 바가 못 됨을 이뇌왕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신라의 압박을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고 도의적으로도 신라의 사위국인 처지에 신라 때문에 나라가 어렵다고 백제에 구원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분간 법흥이 노여움을 풀 때까지 이뇌왕은 강성한 신라의 핍박을 견디는 것 밖에 별다른 수가 없다는 생각에 하나를 이루지 못한 가야누리가 다시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법흥왕은 이번엔 이뇌 왕후가 본래 신라의 왕녀이니 서라벌로 되돌려 보내라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다행히 이뇌왕에 앞서 이뇌왕후가 성큼 나서서 서라벌 사신에게 일갈하였다.

  ‘이미 혼인하여 대가야에 자식을 두었으니, 나는 서라벌 사람이기보다는 대가야의 어미요.’

  대전에서 신라 사신에게 호통을 쳤던 이뇌 왕후는, 그러나 신라로 돌아가는 사신을 따로 불러 법흥왕에게 전하는 두루마리를 아무도 모르게 건넸다. 그로부터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당한 괴로움은 월광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위태로울 테니 대가야를 직접 타격할 순 없었을 신라의 할아버지 법흥왕은 공공연히 탁순국을 혼내주겠다고 협박했다. 신라와 싸울 뜻이 없었으나 탁순은 대가야의 번국이었다. 이뇌왕은 탁순국으로 대가야의 병력 삼천을 보냈다. 그것은 가야누리에선 종주국이 번(蕃)의 상좌에 앉는 대신 지는 의무였다. 그러나 그것은 간교한 법흥왕의 술책이었다. 이뇌왕은 법흥왕의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략을 꿈에도 몰랐다. 희생된 곳은 탁순국이 아니라 탁기탄국이었다. 이뇌왕은 알지 못했다. 아직 힘을 비축하지 못했던 지금까지는, 법흥왕에겐 하나의 강성한 가야가 아닌 백제를 막는 방풍림으로서의 대가야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대가야는 궁극적으로 정복 대상인 것이었다. 바야흐로 법흥의 야심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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