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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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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13.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9화. 성왕의 패퇴

  아령 공주와 월광은 왜를 떠난 지 이레 째 되는 새벽에 아라가야의 높고개 포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높고개 포구에는 벌써부터 한 무리의 병사들이 공주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들이 마차에 얼마 안 되는 짐을 옮겨 실었다. 아라가야 병사들은 한결같이 아령 공주에게 익숙하고도 깊은 신뢰를 가진 듯 보였다. 공주 일행과 월광은 병사들에게 짐을 맡겨두고 그들에 앞서 말에 올라 성산성으로 향했다. 얼마나 갔을까? 멀리서 말 한 필이 먼지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공주가 말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기다렸다. 그가 군복차림이란 걸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공주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걱정마세요. 심복 미루라는 아이요. 그런데 저 아이는 물성 장군과 함께 백제에 있어야 할 아이인데….”

 아령 공주가 긴장한 월광을 안심시켰으나 정작 본인은 긴장한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말이 아령 공주 앞에서 급히 멈춰 섰다. 월광을 흘끗 살펴본 군복 차림의 사내가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역시나 급히 공주에게 허리를 숙여 군례를 표했다. 그의 표정이 매우 경직되어 보였다. 흙먼지와 땀에 흠뻑 젖은 채였다.

  “무슨 일이냐?”

  “물성 장군이 속히 소식을 전하라 해서 달려왔습니다. 새벽에 도착해서 여령 임금님께 소식을 전하고 나서 공주님의 배가 높고개 포구에 당도할 것이란 전언을 듣고 달려오는 길입니다.” 

  “대체 그 급보란 게 무엇이냐? 그것부터 고하라.”

  아령 공주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재우쳐 물었다.

  “어젯밤 기습으로 백제의 성왕이 전사했답니다.” 

  “뭐, 뭐라고? 성왕이 전사했단 말이냐?”

  미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령 공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성왕의 전사라니, 진흥왕이 아니고?’

  월광도 적잖이 놀라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미루의 보고에 넋이 나간 아령 공주의 두 눈이 불안정하게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커다랗게 놀란 두 눈엔 금세 깊은 절망의 빛이 감돌았다. 공주는 마침내 고개를 떨구었다.

  “어떻게, 진흥왕이 아니고 성왕이지?”

  혼란스럽기만 한 월광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의 말을 토하고 말았다. 미루라 불린 병사는 그러나 월광을 흘끔 쳐다볼 뿐 대답이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공주가 월광을 따라 깊은 한숨과 함께 토해낸 혼잣말에 미루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왕께선 매복에 걸렸다 하옵니다.”

  “매복이라고?”

  월광과 아령 공주가 동시에 미루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처음 싸움은 연맹과 백제가 불리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이제 성왕이 시살되었으니 곧 기세가 오른 신라군에 연맹이며 백제가 다 허물어질 것이라며, 월성 장군께선 소식을 최대한 빨리 성산성에 전하라 하셨습니다. 저와 같은 시각에 가야성에도 따로 소식이 달려갔습니다.” 

  아령 공주는 또다시 절망의 한숨을 몰아쉬고 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 누구라 하더냐, 왕을 시살(弑殺)한 자가?”

  “금관 출신의 무력이란 자였다 하옵니다.”

  “무, 무력이라고 했느냐? 그놈이 그예…, 가야 누리의 원수가 되고 마는구나.”

  공주가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란 그 이름은 월광도 아는, 금관가야의 왕자였던 자, 바로 그자의 그 이름일 것이었다. 대가야의 대전에서 대소 신료들을 흥분케 하던, 그 망국의 금관가야의 왕자로서 신라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맹렬한 비난을 받던 바로 그의 이름일 것이었다

  “가야의 손에 가야 누리가 망하게 생겼구나!”

  슬픔인지 허탈함인지 또는 그 무엇인지 뜻모를 실소(失笑)가 공주의 얼굴에 걸렸다 쓸쓸하게 사라졌다. 

  공주를 말에 오르게 한 뒤, 말머리를 나란히 한 월광과 아령 공주의 바로 뒤에서 미루가 따랐다. 미루는 더 드릴 말씀이 있다며, 아령 공주에게 을성의 분노를 전했다. 을성은 미루에게 성왕의 오만이었다 했다. 을성의 말에 따르면, 호위병 오십여 명만을 거느리고 행차할 만큼 전장에 급박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처음 전투에서 백제와 연맹군이 신라군을 한 번 이긴 일쯤으로 변변히 무장도 갖추지 않고 달려 갈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긴 진흥의 배신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으면 그랬겠는가마는, 그래도 그런 행동은 왕자(王者)답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장에서 대왕을 잃은 군대의 결과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 물성 장군은 병사들과 함께 죽을 것이니, 너는 빨리 이 소식을 성산성과 공주님께 전하라는 명을 받들어 밤을 달려온 길이었단다. 아령 공주가 눈으로는 월광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로는 뒤쪽의 심복 미루에게 질문을 이었다.

  “어디서 그리되었다더냐?” 

  “구천계곡이었다 하옵니다.”

  아령 공주가 미루를 돌아보며 다시 다그쳤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들은 총력으로 연맹군과 백제군을 들이치지 않는가?”

  아령 공주의 다그침에 미루가 잠시 잊었다는 제 머리를 쥐어박고서 말을 이었다.

  “장군께선 저들도 무력의 보고를 당장은 믿을 수가 없을 테니 진위를 분명히 확인하고자 할 것이며, 확인하고 나서도 너무나 엄청난 저 무력의 공을 얼마만큼이나 인정해야 하느냐를 두고 군막에서 우선 논쟁이 적지 않을 것이라 하옵니다. 그 때문에 하루 이틀은 대공세를 지체할 것이니, 실은 그때가 동맹과 백제군에겐 천금 같은 기회이지만 왕을 잃은 군대는 결코 충격을 이겨내고 반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스스로 결속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 하시더군요. 그 하루 이틀 사이에 결국 성왕의 피살 소식이 신라군 전체에 퍼져 저들은 모두 아귀가 될 것이고, 같은 시간 동안 성왕의 죽음 소식을 들은 연맹군과 백제군 전체는 공포에 떨며 다만 먹이가 되고 말 것이라고요.” 

  미루의 말을 듣는 아령 공주의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있었다. 

  “이제 곧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육이 벌어질 테니, 이후 백제도 가야 누리도 운명이 어찌 될런지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침울한 표정의 아령 공주가 월광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태자, 지체할 시간이 더는 없게 되었소. 즉시 서라벌로 가야겠소.”

  아령 공주의 표정이 매우 엄숙했다.

  “그냥 여기 있겠습니다, 고모님. 제가 이제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조카, 고모    님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월광은 아령 공주마저 잃는다면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어리석으시오. 이제 오직 서라벌에서만 기회가 있을 뿐이오. 곧 백제와 연맹군  의 패배 소식이 당도할 것이고, 가야 누리는 백제에 병력을 대고 있는 지금 국경은 어디나 허술할 것이오. 오직 지금만이 다시없는 기회요.”

  “그예 가야만 합니까?”

  월광의 목소리가 침울했다.

  “빠르면 대엿새면 전쟁은 끝을 보게 될 것이요. 그 안에 서둘러 서라벌에 도착해야 하오.”

  아령 공주는 밤이 늦도록 월광에게 신라로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르고 또 일렀다. 아령 공주가 밖을 향해 사람을 부르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새벽에 성왕의 전사 소식을 전해 주었던 바로 그 미루였지만, 군복을 벗은 그의 모습을 월광은 처음엔 잘 알아보지 못했었다.

  “미루는 듣거라. 지금부터 네 주인은 내가 아니라 월광 태자님이시다. 태자님은 네 목숨이니라. 알겠느냐?”

  미루라는 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몸을 숙이고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월광에게 절을 올렸다.

  “이제 곧 성왕의 전사 소식이 온 서라벌에 전해질 것입니다. 그 전에….”

  이미 미루도 아령 공주의 지시를 받은 바가 있었던 모양으로 준비해 둔 괴나라 봇짐을 등에 메었다.    

 

  조문촌 쪽을 택했다. 조문촌은 금관가야 시절 금관가야의 땅이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대가야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그렇다고 온전히 대가야의 땅이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바로 그 땅이었다. 강만 건너면 지금은 신라의 땅이 되고 만 금관가야의 옛 고을 추문촌이었다. 대가야 쪽의 조문촌 국경은 이래저래 허술했지만, 강 건너 저편 신라의 초병이 걱정이었다. 조심조심 얕은 물쪽을 택해 강을 건넜고, 다행히 강을 건넌 월광과 미루 앞에 신라의 초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멸망한 금관 가야국의 땅을 선택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나 보았다. 그게 아니라면 백제와 연맹군이 신라와 큰 싸움판을 벌이고 있는 탓에, 신라 쪽에서도 많은 병사들이 전장에 동원되어서, 그래서 이쪽 국경도 이리 허술해진 것일 수도 있으리라. 강물에서 나오자 찬바람이 들이쳤다. 젖은 옷의 찬 기운이 뼛속에 사무쳤다. 뿐만 아니라  물에 흠뻑 젖은 옷이 몸을 자꾸만 휘감아 걷고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기만 하였다. 몇 걸음 앞서 걷던 미루가 키만큼 불쑥 솟은 풀무더기 앞에 몸을 감추고 서서 훌렁훌렁 옷을 벗은 뒤, 젖은 옷을 비틀어 짰다. 미루가 하는 모양을 보다가 하는 수 없이 월광도 미루를 흉내 내어 옷을 벗어 물기를 짰다. 물속에서 금방 나온 탓인지 벗은 옷을 비틀자 물줄기가 말 오줌처럼 쏟아졌다. 옷에서 짜낸 물소리가 커서 둘은 잠시 자갈 바닥에 몸을 낮추었다. 여전히 강변은 어두웠고, 풀벌레만 울었다.     

  밤길을 걷고 새벽을 걷고 아침을 걷고 또 걸었다. 신라의 추문촌을 지나 서라벌로 향하는 동안 월광과 미루가 지난 신라의 마을들은 가야의 마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신라의 백성들도 가야의 백성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월광은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베로 감싼 검을 신라의 촌민이나 순찰병들이 이상히 여겨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월광과 달리 미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월광을 서너 걸음 앞서 걸었다. 강을 건너고 보니 금관가야 땅 추문촌은 이제 신라의 금관부 추문촌이 되어 있었다. 추문촌 현청으로 갈까 하는데 미루가 아령 공주의 뜻에 따라 서라벌 가까이까지 신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충고하는 바람에 다시 하루가 꼬박 더 길을 걸었다. 걷는 동안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에 절어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 보기엔 이제 빌어먹는 처지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미루와 더불어 월광은 마침내 서사로 현에 닿았다. 미루가 월광에게 이곳이 바로 아령 공주님이 말씀하신 곳이라 귀띔하자 월광은 갑자기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 긴장이 되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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