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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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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14.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10화.  월광의 귀순


 “네가 대가야의 월광 태자라고?” 

  서사로부 현청의 대문 앞에서 현위가 코웃음을 쳤다. 

  “태자님의 고명을 들었거든 예를 갖추어라.”

  미루가 현위에게 짐짓 무겁게 명령하자, 곁에서 지켜만 보던 병사가 비웃음을 머금고 다가왔다.

  “대가야의 그 월광 태자? 태자님 꼴이 왜 이러신가?”

  병사들이 월광을 마음껏 비웃었다. 그러다가 한 병사가 한 발짝 나서면서 월광과 미루에게 호통쳤다.

  “이놈들이 뭐라는 거야. 저리 가거라. 이곳은 거지들이 함부로 구걸하는 곳이 아니다.”

  순간 미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억’소리와 함께 호통치던 병사가 갑자기 나동그라지며 얼굴 가득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놈이.”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병사가 다시 달려들었으나 그 병사도 미루에게 아랫배를 채여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열댓 걸음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미루와 월광은 싸움판 한가운데로 얽혀들고 말았다. 월광은 무엇인가 일이 꼬여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어찌할 도리 없이 날아드는 주먹에 난타당했다. 그런 와중에 미루처럼 달려드는 병사들을 향해 발길질도 하고 주먹도 내지르고 잡힌 어깨를 뿌리치곤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둘 다 굴비처럼 엮여 병사들이 쥐어박는 대로 얻어맞으며 현청 마당까지 끌려 가 꿇리게 되었다.

  “네놈들은 무엇을 하는 놈들인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아침부터 이 난동이냐? 여봐라. 저놈들에게 우선 서사로청의 호된 장맛을 보여라.”

  서사로청의 현장은 매우 화가 나서 수염까지 떨며 호통을 쳐댔다. 병졸들이 대답과 동시에 곤봉을 움켜쥐자 미루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현장 나리. 잠시만, 잠시만 소인 말씀을 들으시오.”

  “현장? 현장나리라 했느냐?”

  고개를 비틀어 미루를 내려다보는 현장의 얼굴에도 예의 그 병사와 같은 비웃음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래, 우선 네놈 말이나 들어보자. 할 말이 무엇이냐?”

  미루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분은 대가야의 월광 태자님이시오. 저자가 빼앗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그 증표이니 바르게 살펴봐 주시 

  오.”

  월광은 미루의 침착한 행동에 믿음직스러우면서도 현장의 고까워하는 표정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병사가 미루가 말한 대로 현장에게 베보자기에 싸인 것을 넘겨주었다. 베보자기를 풀자 옻칠에 금빛 테두리를 두른 금갑에 용무늬와 구름무늬가 돋을 새겨진 칼집과 햇빛에 모습을 드러낸 날카로운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잡이에 대가야 태자검이란 명문이 보이시오?”

  미루가 놀라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현장의 감식을 도왔다. 현장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금갑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난 뒤 조용히 몸을 일으켜 대청 한 구석으로 주위를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현청을 내려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대가 정령 대가야의 월광 태자란 말씀이오?”

  현장의 공대(恭待)에 월광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렇소이다.”

  그러나 서사로부 현장은 의혹이 다 가시지 않은 눈초리로 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가야의 태자님이 이곳에 계시는 게요?”

  월광의 폐위 소식은 짐작과 달리 아직 신라에까진 도달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월광은 마음이 무겁고 자괴감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를 월성(月城)으로 데려다주시오. 일이 잘못되어 귀국에 귀순하는 길이오.”

  월광은 아령 공주가 일러준 말을 그대로 꺼냈다. 현장은 놀란 눈으로 한동안 말이 없이 월광을 바라보기만 했다. 현장의 오랜 눈빛이 부담스러워 월광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태자님을 어서 뫼시지요.”

  미루가 월광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때맞추어 현장을 다그쳤다.

  “그래도 확인할 것이 있으니, 예서 좀 더 기다려주시오.”

  “그리하리다. 그대가 의심을 풀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확인하고 또 조사하시오.”

  월광의 결기 어린 말에 현장의 목소리가 오히려 공손해졌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여봐라. 어서 검을 당장 태자님께 돌려드려라.”

  비로소 월광과 미루는 현장이 마련해 준 옷을 갈아입고, 옥수같이 맑은 물에 얼굴과 몸을 씻고 현장의 명으로 차려진 음식으로 오랜만에 포식을 할 수 있었다. 해가 이울 무렵 문밖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서사로부 현장은 당장 안내하라.” 

  밖에서 엄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이윽고 월광 처소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키가 큰 관복 차림을 한 흰 수염 노인이 월광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대가야의 태자님이 맞소?”

  “그러하오만?”

  월광은 긴장하여 그의 눈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노인도 월광의 눈을 뚫어져라 마주 보았다.

  ‘저 눈빛,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

  월광의 생각이 거기에 미칠 때 쯤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태자마마시군요. 소신 우륵 태자님을 뵙습니다, 어흐흐흑. 소신은 태자마마를 몇 번 뵌 적이 있어 이리 보면 알 수 있사옵니다. 대가야국 월광 태자님이시다. 어서 태자마마를 뫼시어라, 어흐흐흑.”

  그래, 우륵이다. 비로소 월광도 그가 우륵임을 알아보았다. 가야 십이 곡을 연주하던 가야금의 창시자요 가야 십이곡(十二曲), 가야 십이무(十二舞)의 창안자인 바로 그 우륵이었다. 우륵을 알아본 후 월광은 타국에서 만난 사람이, 그것도 우륵이라는데 억누르기 힘든 반가운 마음이 치솟았으나 행여 속마음이 드러날까 꾹꾹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대가야를 배신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는 지금 그의 가야금을 진흥왕을 위해 연주하고 있을 터. 가야금 연주가 비록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아닐지라도 적국의 왕의 흥취를 돋우고 적장들과 적신들을 위로하고 있을 터. 과연 우륵은 적국의 장수가 되어 가야 누리에 칼을 휘두르고 있는 저 망국의 금관 김구해의 셋째 왕자 무력과 무엇이 다르랴.     

  “잘 오셨습니다. 외람되오나 태자님께선 가야궁에서 대소 신료들에게 실로 많은 고초를 겪으셨다 들었습니

  다.”

  월광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륵의 말은 월광을 위로하기는커녕 도리어 고깝게 들렸다. 십이 가야 회합연. 그 후 우륵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결국 추문(醜聞) 그대로 대가야를 등지고 지금 여기 서라벌에 봉사하고 있지 않은가. 월광은 자신은 대가야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 서라벌에 와 있지만, 저 우륵은 서라벌에 있기 위해 대가야를 등진 배신자로만 여겨졌다. 준비된 말에 올라서도, 우륵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서도 월광은 우륵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으려 했다. 그런 월광의 기분을 모르는지 월광에게 말을 건네는 우륵의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했다. 우륵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서라벌이 예서 멀지 않다 했다. 그래도 월광은 말이 없었다. 그런 월광을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월성으로 향하는 길 내내 우륵은 시든 버섯처럼 늙은 얼굴에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월광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월광은 들끓는 분노를 지그시 누르며 드디어 우륵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문하시지요.”

  우륵이 담담히 대답했다.

  “공께선 어찌하여 대가야를 떠나신 것이오?”

  우륵이 말잔등에서 가만 눈을 감았다. 

  “그 때문이셨군요.” 

  우륵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긴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월광도 한참이나 우륵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거두었다. 흙길이 끝나고 자갈길에 말의 편자 부딪는 소리만 들릴 즈음, 한참 만에 눈을 뜬 우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자마마, 음악인이란 그 음악이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월광이 물었다.

  “가야에는 더는 음악이 필요치 않다는 말씀이로군요?”

  우륵이 다시 긴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음악은 연주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가야 누리에서 제 가야

  금은 살 수 없는 땅인지라….” 

  월광이 낮은 우륵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고개를 돌려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선대 가실 임금님께선 소인에게 하늘과 땅과 백성을 위해 가야금을 짓고 노래를 지으라 하셨지만, 태자님께서도 가야성 후원에서 직접 보셨듯이 이뇌 임금님께선 스스로 가야금 줄을 끊으셨습니다. 소인 같은 소리를 일구는 자에겐 소인의 소리는 바로 그때 명줄이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가실 임금님께선 가야금으로 번의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고 서로 위안케 하고자 하셨으나 이뇌 임금님께선 가야금을 끊고 상기물, 보기, 거열을 힘으로 징죄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월광의 한숨이 깊었다.

  “그렇다면 공께서 신라로 오신 뜻은 무엇이오?”

  우륵이 다시 월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가라도 십이 번 회합연 때, 서라벌의 젊으신 삼맥종 왕자께서 그 회합에 참사로 오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분께서 이뇌 임금님의 칼을 맞아 줄 끊어진 가야금과 함께 이 목숨도 다 되었구나 여기고 있던 제게, 낯선 음성으로 다가오셨지요. 눈을 떠 보니 웬 헌헌장부가 저를 내려다보시는 게 그분이시더군요. 가야금이란 어떤 물건인가 물으셨습니다. 소인은 기운을 다해 그분 앞에 결연하고자 했습니다. 몸을 곧 세우고 앉음새를 새로 고쳐 나의 가야금에 대해 가야 사람으로서 그분께 심력을 다해 고해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 소인의 미력한 대답만으로도 소인과 소인의 가야금이야말로 귀하다귀하다 하시며 민망스럽게도 한참이나 저를 내려다보셨습니다. 어째서 그때 눈물이 왈칵 솟았는지는 저도 까닭 모를 일이었습니다. 삼맥종 왕자는 그 경황 중에 맑고 분명한 목소리로 소인에게 서라벌로 오라 청하시더이다. 소인은 채 마를새 없이 다시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고백하건대 실은 그때 이미 소인은 그분의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마음이 그리 정해지자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삼맥종 왕자님께서 아직 보에 오르시기 전에, 아직 법흥제께서 월성의 주인이실 때 대가야에 대한 미련 없이 서라벌에 들었나이다. 삼맥종 왕자님께선 이곳 서라벌에 당도하자 다시 또 제게 가야 십이곡을 맘껏 연주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더는 가야금을 사랑하지 않는 대가야에서 가야금만 맥없이 안고 있으면서 늙어 죽을 날만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허황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하오나 대가야를 버렸으면서도 어리석기만 한 소인은 가야궁의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마음이 결코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소인이 서라벌에서 와서 달밤에 취기를 핑계로 가야금을 어루만진 적이 있다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 추태는 아마도 대가야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월광은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초야에 묻혀있던 대가야의 충신 우륵을 다시 불러내어 우륵에게 베푼 것이라곤 가야금과 우륵에 대한 거친 능멸뿐이 아니었던가. 서라벌 월성에 이르는 동안 둘 사이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오호, 그래. 정말 월광 태자님이로고. 짐을 알아보겠소?”

  진홍빛 복색에 황금의 가지 왕관을 쓴 젊은 임금. 월광은 진흥왕의 얼굴을 금세 알아보았다. 비록 어린 날이었지만 그는 고스란히 지난날 상가라도 가야궁의 십이 번 회합연 때 보았던 그 삼맥종의 웃음을, 월광에게 지금도 그대로 띠고 있었다.

  “대가야의 이뇌 왕후께서는 본국의 왕가 분이시니, 나와 그대도 친척 간이라 할 수 있을 거요. 그렇지 않소, 상대등?”

  진흥왕이 월광을 자애롭게 바라보며 나이 든 벼슬아치를 돌아보았다.

  “대가야의 월광 태자님과 대왕께서는 칠촌(七寸) 간으로 대왕께서 태자님의 아저씨뻘이 되시옵니다.”

  그 말에 월광을 바라보는 진흥왕은 더욱 따사로운 표정으로 웃음을 키웠다.

  “왕후께서 짐의 육촌 누이가 되시니, 상대등의 말씀대로 월광과 짐 사이도 아마도 그쯤 되겠지요.”

    진흥왕의 조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월광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월광이 진흥왕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폐하. 조카 월광,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진흥왕이 고개를 맞숙여 답례를 하고 나서 짐짓 시간을 두어 월광에게 물었다. 

좀 전과 달리 정색이다.

  “그런데, 백제와 가야 누리, 그리고 왜가 한 통속으로 신라를 업신여기며 핍박하는 이때, 태자는 어떻게 아무런 소식도 없이 이곳 월궁으로 오셨소?”

  월광은 진흥왕의 물음에는 생뼈같이 단단한 무엇이 들어 있음을 알아챘다. 진솔한 대답이 아니면 안 될 처지가 되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그 간의 가야성의 일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월광은 입이 말랐다.

  “소인, 대가야가 전장으로 나아갈 때 아비로부터 폐태자를 당하였나이다. 나의 이복 아우 찬실이 새로운 태

  자에 봉해지고…, 다행히 가야궁에도 저를 따르는 충신이 있어 찬실이 소인을 시살(弑殺)하려 한다는 급보

  를 전해왔습니다. 이에 모후께서 공분(公憤)하시며, 서라벌의 대왕께선 의를 아실 터이니 우선 급히 서라벌

  로 몸을 피해 대왕께 의탁하라 하셨나이다.”

  진흥왕의 칼 눈썹이 미간을 향해 움찔거렸다. 월광은 허리를 굽힌 채 서 있고, 진흥왕은 그런 월광을 바라본 채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예까지 오느라 고초가 적지 않으셨겠소. …찬실은 괘씸한 놈이로고. 내 찬실을 그냥 두지 않겠소. 이제 태

  자께서는 내게 오셨으니 내 사람이오. 아니 그렇소? 그래 앞으로 어찌하시겠소?”

  진흥왕은 월광이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질문을 거푸 월광에게 쏟아부었다. 월광은 침착하게 다시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대왕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인은 이제 서라벌 사람이 될까 하나이다. 서라벌의 충직한 신하가 되어 저 무도

  한 찬실과 그 무리들을 벌할 기회를 얻을까 하옵니다만 대왕께서 허락해주실는지요?”

  월광의 목소리는 자못 결기가 어려 있었다. 답을 하고 나니 오히려 월광은 자신이 서라벌에 온 까닭에 대해 비로소 새삼 깨달았다. 몸을 피하기만 바빴지 이전엔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광은 이내 대가야가 자신의 적인지 조국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문득 항아전의 모후가 그리웠다. 월광의 뺨 위로 남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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